중국 섬서성 서안기행(1/4) 진시황릉 지하궁전

2013. 6. 12. 00:04해외여행

 

 

 

 

중국 섬서성 서안기행(1/4) 진시황릉 지하궁전

@서안은 섬서성의 성도로서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의 5대 고도(古都)중 하나로 주, 진, 한, 수, 당나라를 걸처 13개 왕조를 거친 수도로서

우리에게는 서안이라는 이름보다 장안이라고 더 알려진 도시가 바로 서안이다.

여기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은 여산의 진시황릉이 아직 미개봉되어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로 근거로 인공으로 조성한 지하궁전으로 

이번 팩키지 여행은 눈요기꺼리에 호기심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원래의 능을 방문하는 것은 스킵하고 대신 여기로 여행사가 대치 한 것이다.  

 

 

@진(秦)나라 31대 왕으로 중국최초의 황제가 된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부터 10여년에 걸처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6국을 멸망시키고 39세에 중국대륙의 최초 통일국가를 세웠다.

천하를 통일한 후 삼황(三皇)오제(五帝)의 황(皇)과 제(帝)를 따서 황제(皇帝)라는 명칭을 만들어

사용한 최초의 시황제가 되었다.

거대한 토목공사와 불로장생(不老長生)에 대한 허망한 집착과

460여명의 선비를 생매장한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사건으로

중국역사상 최대 폭군으로 비판받는 황제이기도 하지만

중국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였다.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59~ BC210년)은 기원전 246년 13살에 즉위 했는데

 즉위와 동시에 여산에다 자신의 묘를 조성시켰다고 한다.

동원 인원 75여만명으로 만리장성, 아방궁과 더불어

진시황의 3대 토목공사 중 하나로 일컬어지며 전체 동원된 인원은 무려 30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 당시 주민수를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진시황의 묘는 동서 485m,남북길이는 515m로 능의 높이는 73m 정도이다.

 문헌에 따르면 50여 장(丈)이라 했으니 환산하면 115m정도가 된다.

 

 

@지하궁전은 중앙에 관곽(棺槨)이 자리하고 매장품을 놓은 봉토(封土)로

그 아래에 사각형으로 주곽실(主槨室), 부곽실(副槨室)과 묘도(墓道)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졌다.

 최근에 알려진 조사자료에 의하면 깊이는 30m정도라 하며 지하궁전 주곽실을 기점으로

 1200평방이 수은으로 채워져 있고, 사후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화살 등

살생용 무수한 암기(暗器)등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문헌에 따르면 천삼천(穿三泉)이라고 했다. 지하수 3개를 파고 들었갔다고 하니

그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사료된다. 현재 중국당국은 지금의 과학지식으로

이 시황의 묘에 숨겨진 비밀을 풀지 못해 발굴은 300년 후로 미루었다고 한다.

 지금의 이 사진들은 모두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과 자료를 근거로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이다. 모형이지만 지하궁전이라 조명이 불실하여 너무 어두웠다.

 

 

@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시황릉은 축조 당시 높이는 200m였으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76m 정도 낮아졌을 뿐 그대로 발견되었다. 

 

 

@진시황릉은 사기에 의하면 일명 여산릉이라 불리며 높이가 116m,

동서길이기가 2.5km, 남북600m이며 죄수 75만명을 동원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형태는 둠식으로 천장에는 진주로 장식한 일월(日月)성진(星辰)이 반짝이고,

 지면(地面)에는 수은으로 하천과 호수를 만들고, 실내에는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고

고래의 뼈와 내장에서 짜낸 기름으로 조명을 했다고 한다.

여산능에 있는 시황의 묘는 천문지리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현실에서 똑같은 지하세계를 조성한 것이다.

묘실 바닥은 황하와 양자강 등 강과 하천을 천장에는 우주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하 수맥까지 파고 들어가 그 안에 망루와 궁전을 짓고 백관의 자리를 만들고

진기한 보물과 기화요초로 단장했다. 위로는 하늘의 형상을 갖추고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어 화려함과 장엄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상제(上帝)가 사는 천상의 누각은 지상에서도 세울 수 있지만

단지 하나 신과 같이 될 수 없는 것은 영생불사(永生不死).  영생불사의 꿈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죽은 희대와 황제가 바로 진시황이다.

불로(不老) 장생(長生)의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한 역사의 폭군으로 악명은 높았지만

 오늘날 죽은 그의 묘소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니

 이는 어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갖은 폭정으로 국민을 도탄에 빠트린 진시황이 죽어서는 오늘날 중국 인민에게 관광지로서

 엄청난 부(富) 안겨주고 있으니

< 죽은 자가 산 자를 먹여 살리는 땅>이라는 중국의 옛말이 빈말은 아닌 모양이다.

 

 

 

 

 

 

 

 

 

 

 

 

 

 

 

 

 

 

 

 

 

 

 

 

 

 

 

 

 

 

 

 

 

 

 

 

 

 

 

 

 

 

 

 

 

 

 

 

 

 

 

 

 

 

 

 

 

 

 

 

 

 

 

 

 

 

 

 

 

 

 

 

 

 

@진시황의 출신내력

진나라의 장사꾼으로 거상이 된 여불위는 진왕 안국군의 아들이지만 별 볼일 없는 인물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는 자초에게 접근한다. 장사꾼 여불위는 거상이 되었지만 더 큰 거상의 꿈을 꾼다.

이왕 부(富)를 축적할려면 국가보다 더 큰 부가 없다고.

당시 진나라 왕인 안국군이 총애하는 부인은 화양부인이었지만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많은 재물과 보화로 안국군의 부인 화양부인에게 뇌물공세를 펴

 마침내 자초를 화양부인의 양아들로 만들어 놓고 다시 안국군의 장자인 태자를 밀어내고

대신 태자 자리를 잇게 한다. 또한 여불위는 자초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의 애첩 조희를 자초에게 보낸다.

조희의 미색에 반한 자초가 인질을 벗어나 왕궁으로 조희를 다리고 돌아갈 때

이미 조희의 몸속에는 한 사내애가 잉태하고 있었다.

안국군이 죽자 자초는 장양왕으로 즉위하지만 여색을 너무 탐하여

 즉위 3년 만에 죽고 조희에게서 태어난 그의 아들 영정이 왕위를 잇게 된다.

그가 바로 훗날 6국을 정벌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다.

그래서 역사는 시황이 된 영정이 여불위의 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장양왕의 죽음으로 13세살에 왕위에 오르자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

그의 애첩이었던 태후 조희와 함께 밀회를 즐기면서 섭정을 하게 된다.

나이탓에 기력이 떨어진 여불위는 훗날 진시황을 견제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건장한 청년 노애를 환관을 입궁시켜 태후 조희에게 접근시켜 권력을 유지한다.

밀회를 즐긴 태후 조회와 환관 노애 사이에 두 아들이 생긴 후 아둔한 척 지내든 진시황은

22세에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두 이복형제를 자루에 넣어 쳐 죽이고 그의 어머니는 영양궁에 연금시키고,

여불위는 파촉으로 유배시켜 자살하게 만든다.

13세 즉위하고 22세에 친정을 시작하여 39세에 천하를 통일하고 50세에 죽은 중국최초의 황제

그가 바로 진시황제이다. 역사는 시황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더운 여름철

시신의 부패로 인한 냄새를 위장하기 위해 생선을 가득 실은 마차를 함께 끌고 왔다고 전한다.

물론 그의 시비와 동원된 기술자 노역자까지 모두 비밀을 지키기 위해 생매장 했지만.

 

 

 

 

 

진시황릉 지하궁전

 

陵圓風光(능원풍광)

地下皇宮(지하황궁)

 

上具天文(상구천문)

下具地理(하구지리)

 

始皇棺寢(시황관침)

死乃與生(사내여생)

 

一覽與秘(일람여비)

回味無窮(회미무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