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6. 00:43ㆍ국내 명산과 사찰
만추의 가을산 강천산(剛泉山)을 가다.
떨어진 잎들 스산한 바람에 구르고,..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남녘의 짜투리 단풍이나마 남아 있을까 하여 십일월의 두 번째 일요일 순창 강천산으로 갔다. 하늘도 오늘따라 재를 뿌린 듯 만추(晩秋)의 적막함이 느껴지는 하루. 실날같은 바램도 무너지고 허전한 마음으로 우이농장을 들머리로 해서 강천산을 올랐다.
들머리에서 조금 오르닌 제일 먼저 보국문이 나온다. 보국국은 외문이 되고 그 뒤에 내문으로 충용문이 있다.
충용문이다. 충용문은 보국문의 내문인 셈이다.
충용문에서 바라본 금성산성길
강천산의 명물은 금성산성과 출렁다리로 알려진 현수교다. 임진왜란이후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3대산성으로 알려진 금성산성은 쌓은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성(城)의 주위 여건 및 고적의 증거로 보아 삼한시대로 추정되며 포곡식 석성(石城)으로 연대봉, 시루봉, 노적봉, 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성과 외성으로 쌓은 산성이다. 1895년 제작된 금성진도(金星鎭圖)에는 내성에는 동헌, 대장청, 내아 등 관청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산성의 축조시기는 고려 우왕6년(1380)<고려자절요>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자료를 보면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조선 태종 9년(1409)에 고쳐 쌓은 후 광해군 2년(1610)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성도 함께 만들었다. 광해군 14년(1622)에는 내성 안에 관청을 건립하고 효종 4년(1653)에 성 위의 작은 담(여장)을 수리하면서, 전반적으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산성전체 길이 7345 m(외성은 6486m, 내성은 859m.) 동학난 때(1894) 격전지로서 모든 건물을 불이 타고 동서남북문의 터만 남아 있고 내성 앞에는 국문영 장군의 비석이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에는 성안에 있던 보국사마저 불에 타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철마봉 가는 길, 이 능선의 산성은 허물어진 터만 남아 있다. 멀리 담양호가 보인다. 하늘빛이 재빛이라 그런가 담양호는 마치 운무 속에 숨어 있는 듯 하다.
가야할 철마봉의 모습, 산은 베옷을 입고 있다. 이제 겨울 차비를 하는가 보다.
산성을 오르는 길은 바위 너들길이다.
비가 내렸나. 낙엽에 덮힌 너럭 바위가 미끄럽다.
앞은 낭떠러지인데 더문 더문 돌무덤처럼 남은 옛산성의 흔적들. 낙엽과 함께 스산한 느낌을 준다.
바바로 밑에서 올려다 본 철마봉 정상
철마봉 마루의 곰삭은 기암, 세월만큼 상흔이 깊은 돌인가 보다.
철마봉에서 내려다 본 담양호. 흡사 가은산에서 청풍호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철바봉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 가공되지 않은 자연파편석 그대로 바위 너들길이다.
서문과 북문으로 이어지는 산성 전경
북문 가는 길에 바라 본 서문터
북문 가는 길의 산성,
북문터
강천산(剛泉山) 안내글에 의하면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에 있는 산으로 높이 584m. '호남의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노령산맥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광덕산·산성산·추월산 등이 있다. 산은 낮으나 기암절벽과 계곡 및 울창한 숲 등이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강천산·강천호·광덕산·산성산을 포함한 일대가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은 15.7㎢이라고 한다. 오늘 산행은 여기 북문에서 강천사로 하산하기로 했다. 지루한 감도 들고 굼뱅이 걸음으로 산악회의 예정된 시간을 맞출수가 없어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테마공원의 조각상들
테마 공원 바로 아래에 강천사가 있다. 왜 절집 위에 허구많은 테마가 있는데 이런 조각상을 노천에 전시 했는지 의아심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강천사가 창건 된 그 시대상(진성여왕의 부패상의 그 내력과 시대상)을 암시하는 작가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구장군폭포의 안내글에 남근석과 여근석이란 말이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다.)
진성여왕(眞聖女王?~897)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632~647)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사상 3명 뿐인 여왕인 신라 제 51대 왕이다. 당시 모든 나랏일은 상대등 위흥이 좌지우지 했는데 위흥은 진성여왕의 숙부이자 애인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인륜을 무시한 음란한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당시 풍습으로 그렇지 않았든 모양이다. 진성여왕은 색기가 넘쳤는지 위흥이 죽자 미남자들을 노골적으로 궁중으로 끌어들여 심히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정치는 부패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그 민란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후백제의 초대왕인 견훤, 후고구려의 초대왕인 궁예, 적고적등이었다. 이로 인해 역사가들로 부터 음란한 여왕으로 정치를 잘못한 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비판받고 있는 왕이 바로 진성여왕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성에 대한 욕망보다 강한 애욕은 없다. 이성에 대한 욕망은 그 크기가 끝이 없다. 다행이도 그것이 하나이기 망정이지 만약 둘이었더라면 천하에 도를 닦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佛言 愛欲莫甚於色 色之爲欲 其大無外 賴有一矣 若便二同 普天之人 無能爲道者矣
< 四十二章經 이야기 제 24장 에서/拙著>
강천산에 조성된 인공폭포인 구장군폭포다
구장군폭포를 내려오면 산 위에 이런 동굴이 보인다. 내력에 대한 소개가 없어 자연동굴인지 인위적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묘한 동굴이다.
영암 월출산의 구름다리, 대둔산의 출렁다리와 더불어 남한 3대 출렁다리로 일컬어지는, 강천산의 백미로 일컬어 지는 현수교다. 높이 50m, 길이 76m다. 월출산의 다리는 천왕봉을 오르내리기 위해서, 대둔산의 출렁다리는 마천대를 오르내리기 위한 것인데 강천산의 이 현수교는 원점회귀를 하는 다리다. 어딜 연결하기 위한 것인지.. 다리라는 본래 의미를 상실한 다분히 관광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의도된 다리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둔산의 출렁다리
월출산의 구름다리
현수교에서 내려다 본 풍경, 단풍이 있었다면 멋진 풍경이 되었을 텐데...
강천사 (剛泉寺) 대웅전과 5층석탑. 현재 강천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末寺)로 887년 진성여왕 때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도선(道詵:827~898,전라남도 영암출생)은 신라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도 속성(俗性)은 김(金)씨다. 신라 헌강왕 1년 송악에 머물 때 「2년 뒤 여기에 고귀한 분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그의 말대로 고려 태조가 태어났다. 이 예언 때문에 도선은 유명해졌고, 태조 이후 고려왕들은 도선을 극진히 존경해 왔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3년(1316년) 덕현스님이 오층석탑과 12개 암자를 창건하여 사세(寺勢)를 확장하였으며, 조선 성종13년(1482년)에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薛)씨의 시주를 얻어 중창하였다. 영조 36년(1760)에 편찬된 옥천군지에는 명적암(明寂庵), 용대암(龍臺庵), 연대암(連臺庵), 왕주암(王住庵), (적지암積智庵) 등 5개의 부속 암자가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그 중 왕주암은 후삼국의 분쟁이 한창이던 때에 왕건이 이 암자에서 유숙하였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4년 태능(太能)이 중창하였다. 다시 1855년(철종 6년) 금용당이 재건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칠성각, 첨성각, 보광전의 당우가 불탔다. 그뒤 주지 김장엽이 1959년에 첨성각, 1977년에 관음전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대웅전과 보광전, 관음전, 요사채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에 있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인 삼층석탑과 금강문(金剛門) 삼인대(三印臺: 전라북도 유형문화재27) 등이 있다. 또한, 삼층석탑 북쪽 약 1m 지점에는 중대석과 보주만이 남아 있는 석등이 있다. 자연암석으로 된 사각문인 금강문은 1316년 덕현스님이 절 주위의 경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인대(三印臺)는 세 사람의 관인을 소나무에 걸었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으로 조선조 충절과 의리, 선비정신 표상을 상징한다. 지방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인대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 연산군 27년(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된 후 공훈을 세운 조정의 신하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영구히 누리기 위하여 반정을 반대한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중종의 본 부인을 몰아 내고 장경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에 당시 순창군수인 충암 김정(庶庵 金淨), 담양부사 눌재 박상(訥齋 朴祥), 무안현감 석헌 류옥(石軒 柳沃) 세 사람이 소나무 밑에서 관인을 걸고 중종반정 당시에 억압에 의하여 억울하게 쫒겨난 신씨부인을 중전마마로 다시 추대하고 반정공신들의 횡포를 처벌할 것을 결의하고 상소를 처음으로 조정에 올렸다. 삼선생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관직에서의 추방과 죽음을 각오하고 천지인륜과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국모를 내몰았던 박원종 일당의 횡포까지를 통열히 공격했던 것이다.
삼인대 안에 모셔진 비각의 초안은 김정이 짓고 그내용에 대한 결정은 박상이 내렸다. 마침내 박상은 남평으로 김정은 보은에 유배당하기에 이르렀다. 상소는 우리의 충, 효, 의리정신과 대의명분에 입각한 충심의 선비정신이다. 자신의 이익보다 나라를 위하여 정론을 주장했던 삼 선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정신적 지주와 도덕의 귀감이 되고 있다.
순창의 고추장을 홍보하기 위한 것인지 다리도 고추와 장독으로 조각되어 있다..
금성산성에서
떠나 갈 것이 떠나 버린
만추의 가을산
물기 뺕어 버린
숲과 나무들 뿐이다.
철마봉 산마루엔
곰삭은 바위들
무상한 세월의 상흔인가.
공명의 허망함을 말하는가.
절애를 앞에 두고
첩첩이 쌓인 산성의 돌
뼈저린 그 날의 아픔
네 아느냐고
오가는 길손에게 소리 없이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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