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7. 23:40ㆍ삶 속의 이야기들
타산지석(他山之石)
자운봉 오르는 길은 많지만 좀 한적한 코스로 오르고자 오늘은 도봉산역이 아닌 망월사역에서 내려 천문사 쪽으로 들머리로 삼았다. 절 이름이 왠지 생소해서 호기심이 난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들어가 보니 사찰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모든 것이 내 기대와는 영 딴 판이라 발길을 되돌려 능선을 올랐다. 반 시진 정도 오르다보니 원효사 뒷길과 바로 만나는 길이었다. 자운봉 오르는 험한 길 중 쇠줄과 쇠난간을 통과해야 코스는 도봉산역에서 오른다면 다락능선에서 이어지는 Y계곡이 가장 험난하고 그 다음으로는 이 코스가 아닌가 싶다. 원효사 뒷길에서 포대능선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다른 코스와 비교해서 산꾼들이 좀 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작년, 아마 지금 이 때쯤은 눈까지 쌓여 몹시 힘들었던 길임을 생각하며 느긋하게 능선을 따라갔다. 오늘따라 산꾼들도 그리 많지 않아 생각대로 호젓했다. 날씨조차 스산해서 더 그런가 보다.
쇠줄과 쇠 난간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암릉길. 한참 힘들어 올라가는 데 바로 내 앞에서 오르던 한 산꾼이 스틱을 떨어뜨렸다. 가파른 암릉 길이라 10미터나 넘게 굴러가 떨어졌다. 뒤따라 오르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바로 뒤인 나를 처다 보더니 내려가서 좀 주어달란다. 여기가 무슨 경로석 자리 양보하는 전철이나 버스도 아닌데. 쇠밧줄과 쇠난간에 의지하여 오르는 이 암릉 슬랩 중간에서 자기는 기다릴 테니 면식도 없는 나들러 내려가서 주어달라니.. 어찌 저리 염치도 없고 뻔뻔스러운 소리를 할 수가 있을까. 기가 막혔다. 한 소리 하고 싶은 마음이 울컥댄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나 보다는 연장자인 듯하다. 그래도 그렇지... 어찌 그런 부탁을. 잠시 숨을 돌리고 생각했다. 그래 노인인데,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산 사람 부탁인데. 아직은 내가 당신보다 젊었으니 하고 마음을 그렇게 돌려 힘들게 올라온 쇠난간을 타고 다시 내려가 바위틈에 떨어져 있는 것을 간신히 찾아 갔다 주었다.
그런데 스틱을 받았든 노인이 내 스틱을 유심히 이리저리 보고 있지 않은가. 이상해서 그 노인의 스틱을 보니 기역자 모양의 손잡이 부분이 떨어져 있었다. 재질이 플라스틱이라 바위 위에 떨어질 때 아마도 부셔진 모양이다. 그런데 올라오면서 자기 것과 내 것을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를 의심한 모양이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내주니 보따리 찾아달라는 속담처럼 부러진 스틱 물어내라는 식으로 처다 본다. 일언반구의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더구나 젊은이도 아니고 나이들만큼 드신 분이 사리분별을 그리하다니. 고맙다는 그런 소리를 못할망정 어찌 그런 눈으로...한참 머뭇머뭇 하더니 내 것은 일자 모양이라 자기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던지, 아니면 좀 겸연쩍어서 그랬던지 외제인데다 10여년 손에 익은 것이라서 애착이 간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고개를 돌려 휑하니 가버린다.
늙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걸까. 뻔뻔해지고, 의심하고, 자기 본위의 욕심만 채우려고. 생각할수록 마음이 섭스레하다. 나도 더 늙게 되면 저리 될까? 산을 내려오면서 섭섭했든 마음이 계곡바람으로 식혀지자 도리어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내 뒤 모습은 고아야 할 텐데.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고. 어둠과 함께 자운봉을 뒤로 하고 내려오면서 말없이 우뚝한 만장봉을 쳐다보고 또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작은 그 어느 하나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