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10. 23:35ㆍ야단법석
<춘천 의암땜에서>
삼법인의 메시지
이 세상에 영원한 것 있던가?
모든 것은 무상하고,
바뀌고 변하며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뿐이다.
그럼으로 모든 것은 주어진 그대로서는 어려움이 있고,
불편하고 제한이 있으며, 따라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가.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무상한 존재이며
무상한 존재는 따라서 영원한 실체가 없고,
실체 없는 것은 자주성(自主性)이 없기 때문에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현실은
영원한 것을 바라고,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 어긋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나무가 홀로 있고 싶지만
바람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꽃이 홀로 있고 싶지만
벌 나비들이 놓아 주지 아니하듯
우리네 인생은 어느 하루라도
번뇌와 고통의 바람이 끊이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은 기쁨이라면
그 청년이 백발의 노인으로 늙어 가는 것은 슬픔이요,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가난한 자가 노력하여 부자가 되는 것은 기쁨이지만,
부자가 그의 재산을 영원히 지키지 못하고
잃게 되는 것, 그 또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럼으로 삶이란 다름 아닌 총체적 고통인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영원불변한 것은
적어도 주어진 세간에 존재하는 한 결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요구가, 우리들의 욕망이
그것을 끝내 구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것이 고통(苦)이요 번뇌가 아니겠는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란
단순히 허무한 인생이나, 절망적인 삶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범부들이 지고하고 심오한 열반이라는 이상(理想)을
깨닫지 못한 체 당면한 욕망에 미혹되어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먼저 경고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세속(世俗)의 중생들을 위한
성자의 견지에서 판단한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삼법인의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열반적정인을 말씀하신 것은
욕망의 이면적 의의에 대하여 그 이상(理想)의 기준을 세우고,
그것에 의해 현실적 욕망을 관찰하고 평가하여
욕망은 스스로 자기를 배반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현실을 벗어나는 길을 밝히신 것이다.
그 밝은 길을
부처님은 무명(無明)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명을 벗어나기 위해
도리어 지식과 같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를 얻으려 하고 있다.
갖가지 분별심을 일으켜 열반을 구하려고 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이런 현실의 기원을 무명이라고 이름 한 것은
어떠한 지식으로도
참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理想)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심명에서 이르기를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다』
라고 하지 않았는가
마음에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무상과 무아를 자각할 때만이 그기에 열반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주먹 진 손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경우 분별심이 생긴다.
그러나 손을 펴서 그것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진리는 이렇게 걸림이 없이 바로 볼 때 아는 것이다.
무명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 가려진 것은 다름 아닌
번뇌, 지식, 개념, 혹(惑) 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현재의 부자유와 불만족은
모두가 그런 것 때문에 애욕에, 아집에 사로잡혀
속박되고 갇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연의 법칙 안에서의 우리들의 의욕이요,
욕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럼으로 이것들을 벗어나야
자주적(自主的) 삶이 가능하게 된다.
무상과 무아를 자각해야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증도가에 이르는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 되는 것이다.
분별이 사라진 마음은 자주적이 되고
이렇게 자주적이 되면, 습(習)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상한 이 삶에서의 해탈이요, 열반인 것이다.
삶 속에서의 해탈이란 자주적. 보편적 생활을 수용하는 것이다.
열반이란 곧 해탈이요,
해탈이란 곧 진리에의 자각이라고 한다.
자각이란 곧 무명을 여의는데 있는 것이다.
신이나 절대자에 의한 선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해탈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율법만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므로
그것을 지키면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기독교들의 <구원> <부활>의 의미는
보상이지 해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르시길
모든 사람들은 미혹의 깊은 강에 빠져 있다고 했다.
얕은 강은 걸어서도 나오지만 흐르는 깊은 강물은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해도 더 멀리 떠내려 갈 뿐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무상성과 무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의 본성을 놓치고 미혹이란 깊은 강 속에서
허망한 분별심과 다투고 있기 때문에
더욱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부처는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란 누구인가?
무상의 진정한 의미와 무아의 진실을 자각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참된 진리는 어디에서 구하려 하는가?
『눈도 둘이요, 귀도 둘인데, 입은 하나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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