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의 단상(斷想)7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2025. 3. 29. 18:54십우도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고 한다.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보살은

위로는 보리(菩提)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번뇌를 앓고 있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구(句)는 자리행(自利行)을 말하고

아래 구(句)는 이타행(利他行)을 말하는 모양이다.

보리를 추구한다는 말은 부처가 되겠다는 의미다.

부처가 된다고 함은 위없는 구경의 지혜를 성취한다는 의미다.

교화한다는 말은 통속적으로 이해하면

보리를 성취하고 나서는 중생들에게 베풀라는 의미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네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의미와 같다.

보리를 성취한 귀결점이 이런 것이라면

무언가 이상하다.

교화(敎化)가 무슨 자선행사처럼 들리고,

보리가 자선행사의 마중물처럼 느껴진다.

선가(禪家)에서는 깨달을 위한 수행의 방법을 소에 비유하는데

성전(聖典)처럼 회자하는 두 개의 교범(敎範)이 있다.

소 그림으로 시작되는 십우도(十牛圖)다.

 

십우도(十牛圖)는 글자 그대로 소를 찾아 깃들이는 방법을

선(禪) 수행에 빗대어 10가지로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나는 곽암(廓庵) 선사의 십우도이고

다른 하나는 보명화상(普明和尙)의 십우도다.

곽암(廓庵) 선사는 벽암록으로 유명한

원오극근선사와 동문수학한 대수원정(大隨元淨)의 제자로

송(960~1279)대의 선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명화상(普明和尙)은

중국 명나라(1368~1644) 때의 선승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저술이라고 하는 〈목우십도송〉이

〈불조요경〉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십우도에 나타난 두 선승의 귀결 종점이 다르다.

보명화상 십우도의 마지막 10도(圖)는

쌍민(雙泯)으로 끝나고,

곽암선사 십우도의 10도(圖)는

입전수수(入廛垂手)로 끝난다.

쌍민(雙泯)이란 모두 사라졌다는 말이다. 공(空)이다.

그림에서는 찾는 사람도 대상인 소도 모두 없어지고

둥근 원형인 일원상(一圓相)만 나타나 있다.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저잣거리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림을 보면 한 손에는 망태를 들고

한 손으로는 호리병을 든 노인이

봇짐을 매단 막대기를 어깨에 걸친

사람을 만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일원상이 자리행(自利行)을 의미한다면

입전수수는 이타행(利他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곽암선사의 십우도에서는 이런 송어(頌語)가 붙어 있다.

 

「싸리문 걷어 닫고 홀로 앉으니, 천명의 성인도 모른다.

자기의 풍광을 묻어 버리고 옛 성현의 걸어간 길도 저버렸다.

표주박 차고 저자에 들어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간다.

술집, 고깃집, 생선가게(의 사람들을) 교화하여 성불하게 한다.」

 

柴門獨掩(채문독엄) 千聖不知(천성부지)

埋自己之風光(매자기지풍광) 負前賢之途轍(부전현도철)

提瓢入市(제표입시) 策杖還家(책장환가)

酒肆魚行化令成佛(주사어행화령성불)

 

보리를 성취한 두 선승의 귀결점이 왜 이렇게 다를까?

강물을 바라본다.

사색의 여울이 출렁거린다.

 

일원상(一圓相)은 구경(究竟)의 공(空)을 의미한다.

보리를 성취했다는 말은 부처가 되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일체 중생계를 초월했다는 의미다.

공(空)은 무아(無我), 무아소(無我所)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아닌가.

빈털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베푼다는 말인가?

보리의 귀결이 공(空)을 성취하는 것이

단지 이런 것이라면 무언가 허전하다.

그래서 곽암 선사는 그 귀결점을 바뀌었다.

한 손에 망태를 들고

한 손에 호리병을 든 노인이 되어 돌아온다.

보리도 놓아두고 중생 세계로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화할 중생이 있다면 <나>가 있어야 한다.

<나>가 없다면 구제할 중생이 어디 있는가.

 

내가 집을 떠나면 이방인 되고, 나그네가 된다.

그러나 내 집에 돌아오면 내가 주인이 된다.

이방인도, 주인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다.

전(前)과 후(後)가 두 사람이 아니다.

 

 

보리는 본래

있었던 것인가?

본래 없었던 것인가?

득지본유(得之本有)요 실지본무(失之本無))다.

찿기 전에도 있었다면 그것은 본래 내게 있었다.

없었다면 그것은 본래 내게 없었던 것이 아닌가?.

잉어가 물장구치니 물방울이 튄다.

강물을 벗어나면 물방울이지만

강물 속으로 다시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말한다.

강물은 강물이고 물방울은 물방울이라고.

중생이 있어 보리가 있는가?

보리가 있어 중생이 있는가.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이라면

누가 누구를 교화한다는 말인가?

 

깨달음에는 선후(先後)가 없다는데

선후(先後)에 따라 구별한다는 말인가?

前도 나고, 後도 나다.

말이다, 말뿐이다.

보리란 말도 교화라는 말도,

중생도 부처도 그러하다.

강변을 바라본다.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흘러가는데

백로 한 마리 뚫어지라 먹잇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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