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2024. 10. 6. 14:09경전과교리해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글귀만 풀이한다면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라는 의미인데

이는 대승(大乘)과 선문(禪門)에서 회자하는

법문 중 하나다.

 

먼저 자귀(字句)를 풀어보자.

만법(萬法)이란 우주간의 유형무형 온갖 만상(萬象)을

총괄하는 말이지만 불교에서 총괄한다는 것은

곧 법계라는 의미하는 것이다.

법계(法界)의 성(性)은 체(體)로서 불개(不改)를 의미하고,

만유의 사리(事理)에는 하나하나 자체(自體)와

궤칙(軌則)을 갖추고 있으므로 법(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법성(法性)은 실상진여(實相眞如), 법계,

열반 등 이명(異名) 동체(同體)로 불린다.

경(經)에 의하면 그 법은 모든 법에 들어가며,

여(如)를 따르기 때문에 따를 것이 없고,

실제에 머물러서

모든 변견(邊見)에 움직이지 않으며,

흔들림이 없어 일체 경계에 의지함이 없어서

가고 옴이 없다.

그러므로 법은 공(空)에 순(順)하고

무상(無相)을 따르고, 무작(無作)에 응하며,

아름답고 추함을 벗어났으며, 더하고 덜함이 없으며,

생멸을 벗어나 귀의할 곳이 없어 법성이라고 한다고 했다.

계(界)는 5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 차별(差別)의 뜻이니.

피차(彼此)의 사물을 구별하여 뒤섞이지 않기 때문이고,

둘은 성(性)의 뜻이니.

사물 고유의 체성(體性)을 이름한 것이고,

셋은 인(因)의 뜻이니.

다른 물건을 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요,

넷은 종족(種族)의 뜻이고,

다섯째는 지(持)의 뜻이니,

사물이 각각 자상(自相)을 유지함을 이름한 것이다.

 

요약하면

계(界)란 종자(種子), 본성(本性), 종성(種性),

미세(微細), 임지(任持)를 말하며, 일체법의 종자,

즉 아뢰야식(阿賴耶識) 가운데 제법의 종자를 말한다.

계(界)는 인(因)이 되기 때문이며,

자상(自相)을 집지(執持) 하는 공능을 갖기 때문이며,

인과(因果)의 성(性)을 집지 하는

공능을 갖기 때문에 계(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는

「만법이 바로 진여다. 불변(不變)하기 때문이다

. 진여가 바로 만법이다. 연을 따르기 때문이다

(萬法卽眞如 由不變故 眞如卽萬法 隨緣故)」

라고 한 것이다.

<돌아간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경문을 보다 보면 귀원(歸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생멸 변화의 세계를 벗어나

진적(眞寂: 생긴 그대로 평온함)의 본원(本元)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와 같이 본래 생긴 그 자리도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 하나(一)의 의미는 진여인 마음의 본체를 가리키며,

법성(法性), 청정법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가(禪家)와 대승에서 말하는 <주인공>,

<본래면목(本來面目)>, <일심(一心)>,

<진심(眞心)이란 말이나

<보리심> <반야바라밀> <실제>란 말도 같은 의미로

표현만 다를 뿐 그 뜻하는 의미는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말은

만법의 생멸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대승법계무차별론(大乘法界無差別論)》에서는

「청정한 법성이 곧 법계다. 나는 이 자성청정심에 의지하여

불가사의한 법을 설하노라.”」라고 했다.

여기서 청정 법신이란

객진의 온갖 고통을 멀리 떠나기 때문이며,

자성의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 법을 깨달아 얻는 이를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라 한다.

적정(寂靜)하고 청량하며 불가사의한

열반의 경계에 상주(常住)하고, 항상 안락함을 수용하니,

일체중생이 귀의하고 믿는다.

하나의 성품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곧 법신이고, 또한 여래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진리[聖諦]의 제일의(第一義)라고

말하며,  그 의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열반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으며,

공덕이 서로 떠나지 않으므로

열반과 다르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속담에 불법을 배우는데 1년이면 부처가 눈앞에 있고,

2년이면 대웅전에 있으며,

3년이면 서천에 있다는 말이 있듯

불법을 알기는 갈수록 멀고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사의하다는 의미다.

《문수사리 소설 반야 바라밀 경》에는

부사의(不思議)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법계는 곧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 곧 부사의요,

부사의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과 법계는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이 곧 법계요,

법계는 곧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

곧 반야바라밀의 경계가 된다.

반야바라밀의 경계[般若波羅蜜界]가

곧 부사의 한 경계[不思議界]며,

부사의의 경계가 곧 생김이 없고

멸함이 없는 경계며, 생김이 없고 멸함이 없는 경계가

곧 부사의의 경계입니다.”」라고 했다.

 

또 「만약 본성이 체가 없고 집착이 없음을 알면

곧 이름하여 만물이 없다[無物=空]고 하며,

만약 만물이 있음이 없다면 이는 처소가 없는 것이다.

의지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면 곧 생김이 없고 멸함도 없으며,

생김이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무위(無爲) 공덕이며,

만약 이와 같이 알면 곧 마음의 생각이 없음이니,

마음의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마땅히 알겠는가.

유위(有爲)와 무위의 공덕을 알지 못하면

곧 부사의(不思議)요,

부사의란 이것은 부처님이 아실 바이요,

또한 취함도 없고 취하지 아니함도 없으며,

삼세(三世)의 가고 오는 등의 모양을 보지 못하고,

생기거나 멸하며

모든 일어나고 짓는 것을 취하지 아니하며,

또한 끊음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다.

이와 같이 아는 자는 이것을 이름하여

바른 지혜[正智]요, 부사의 한 지혜라 하며

허공과 같아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이

견주어 비교할 수 없으며, 좋고 나쁨이 없고,

같음도 없고, 모양도 없고 얼굴도 없다.”」 라고 했다.

 

불가사의한 이 법을 깨닫는다는 말은 보리심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보리심의 불가사의한 형상의 차별상을

동경(同經)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보리심은 일체중생의 몸에서 열 가지의

차별 없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른바 짓는 바가 없으니

무위(無爲)이기 때문이고,

시초가 없으니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다함이 없으니 멸함이 없기 때문이고,

물들어 더러워짐이 없으니,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법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지혜로 아는 바이니,

일체법이 무아(無我)이고 일미(一味)의 양상이기 때문이고,

형상이 없으니 온갖 근(根)이 없기 때문이며,

성인이 행하는 바이니,

부처님ㆍ대성인[大聖]의 경계이기 때문이고,

일체법이 의지하는 바이니, 오염되고

청정한 모든 법이 의지하기 때문이며,

항상하지 않으니 이는 잡되게 물들어서

항상하는 법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단멸하지 않으니 이는 청정하여

단멸하는 법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이 법신은 본제(本際)가 가없으니,

번뇌장(煩惱藏)에 얽매여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생사로 나아가 그 가운데서 생하고 멸하면서

흘러 구르는 것을 중생계라 하느니라.

또한 사리불이여, 이 법신은 생사에 표류하는

괴로움을 싫어하여 떠나고 일체 모든 탐욕의 경계를 버리고

10 바라밀 및 8만 4천의 법문(法文) 가운데서

보리를 구하여 온갖 행을 닦으면 보살이라 하느니라.

 

또한 사리불이여, 이 법신은 일체의 번뇌장으로부터

해탈하고,

일체의 괴로움을 멀리 여의며,

일체의 번뇌와 번뇌를 따르는 허물을 영원히 없애어

청정하고도 아주 청정하고 지극히 청정하여

법성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관찰할 수 있는 경지와

일체 모든 알음알이를 다 없앤 경지에 이른다.

또한 무이(無二)한 장부(丈夫)의 처소에 올라

장애가 없고, 집착함이 없는

일체법의 자재력(自在力)을 얻는데,

이를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중생계는 법신과 다르지 않고

법신은 중생계와 다르지 않으니라.

중생계가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계이니라.

이는 단지 명칭만 다를 뿐

뜻은 다르지 않은 것이니라.”」라고 했다.

 

@이를 요약해서 풀어보면

보리심의 인(因)이 쌓여 모인 다음에는

두 가지의 양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오염을 떠난 청정한 모습[離染淸淨相]과

백법소성상(白法所成相)이다.

오염을 떠난 청정한 모습이란

이 마음의 자성이 물들지 않고,

또한 객진번뇌(客塵煩惱)의 장애를 떠나보내어

청정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

백법소성상(白法所成相)이란

이와 같은 자성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은

일체의 백법이 의지하는 바이다.

일체의 백정법(白淨法)으로

그 성품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만법의 근원인

청정한 보리심은 최상의 진실이요,

이 진실한 이치를 공(空), 또는 진여(眞如),

실제(實際)라고 이름하며, 이것이 바로 모습을 갖지 않는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질문은

곧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법계무차별론》을 보면 변적보살이

연수보살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일체의 온갖 법은 어디로 향하여 갑니까?”

(又問:“軟首!一切諸法爲何所趣?”)

연수보살이 답했다.

“향하여 가는 곳은 자연 그대로 진실합니다.”

(答曰:“所趣自然。”)

변적보살이 또 물었다.

“일체중생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又問:“一切衆生爲何所歸?”)

연수보살이 답했다.

“그 짓는 일을 따라 돌아갑니다.”

(答曰:“隨其所作。”)

변적보살이 또 연수보살에게 물었다.

“일체의 온갖 법은 짓는 일도 없고

받는 일도 없지 않습니까?”

연수보살이 답했다.

“선남자여, 그 법계(法界)란 짓는 일도 없고

받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이,

평등하게 모든 법을 이끌기 때문에

법계(法界)라고 합니다.”

(答曰:“族姓子!其法界者無作、

無報、無往,等御諸法則爲法界。”)

변적보살이 또 물었다.

“어째서 짓는 일도 있고 받는 일도 있고

가는 일도 있다고 말하면서,

가는 일이 없다고 말하십니까?”

연수보살이 답했다.

“선남자여, 그 지은 대로 받는 것처럼,

가는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答曰:“族姓子!如其所作、如其所報,所往亦然。”)

변적(辯積)보살이 연수보살에게 또 물었다.

“짓는 일이란 무엇이며 받는 일이란 무엇이기에,

무엇 때문에 가는 일이라고 하십니까?”

연수보살이 답했다.

“짓는 일과 같이 받는 일도 그와 같으니,

가는 일도 그와 같습니다.”

(答曰:“如所作者,報應亦如,所往亦如。”)

번적보살이 연수보살에게 또 물었다.

“뿌리도 없이 텅 빈 그대로 진실하다면,

짓는 일도 없고 받는 일도 없고,

향하여 가는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연수보살이 답했다.

“그대가 말한 대로 뿌리도 없이 텅 빈 그대로 진실하다면,

짓는 일도 없고 받는 일도 없고, 향하여 가는 일도 없으니,

짓는 일과 받는 일과 향하여 나아가는 일도

그와 같이 오거나 가는 일이 없습니다.

짓는 일과 받는 일과 향하여 나아가는 곳도,

뿌리도 없이 텅 빈 그대로 진실하여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 온갖 법은 환(幻)과 같아서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며, 일체중생도 이와 다름없이

평등하여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모든 법을 유(有)라고 말하고 싶어도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요,

무(無)라고 말하고 싶어도 인연이 있으면

생기기에 무(無)라고 말할 수도 없고,

스스로 생겨나지 않기에 유(有)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뿌리도 없이 텅 빈 그대로 진실하여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로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숭앙받았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비한 것은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재(自在)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재하다는 것은 모든 법이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자연도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을

일으켜 세움이 없기 때문이요,

차질(蹉跌)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모든 법이

형상[形貌]을 벗어났기 때문이요,

형상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이 허무(虛無)하기 때문입니다.

가려 덮는 장애가 없다는 것은,

모든 법에 교화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교화의 모양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이 자연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존재를 벗어났다는 것은,

모든 법이 돌아갈 곳을 놓아버렸기 때문이요,

돌아감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이 따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로 떠남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요,

의지함이 없다는 것은

모든 법이 자연 그대로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벽암록》 제45칙에 나온 선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지만, 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라고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擧.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이 공안은 《조당집》, 《전등록》,

《조주록》 등에도 나와 있습니다.

 

@법성은 일체 언설이나 희론을 벗어나 있어

언어도단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

무위(無爲)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래가 설한 법은 희유(稀有)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여래께서 설하시는 모든 법은 성품이 없고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어

일체의 세간(世間)이 믿고 알기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법은 생각[想]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생각[念]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취(取)도 없고 버리는 것[捨]도 없고

희롱(戱論)함도 없고 뜨거운 고뇌도 없다.

차안(此岸)도 아니며 저 피안(彼岸)도 아니며,

어리석음이 아니며 현명함도 아니며,

무량한 지혜로써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

사량(思量)으로써

능히 알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생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려고

방편을 쓰지만 방편도 희유하지만,

이 또한 진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불장경(佛藏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법성을 증득(證得)하신 분은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증득한 그 법을 보리심이라 합니다.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에서도

그 보리를 이렇게 설합니다.

「보리(菩提)란 다만 명자(名子)일 뿐이어서

세속 때문에 말하는 것일 뿐, 어떤 형체도 없고,

빛깔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고 모양도 없고,

나아가는 것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없고

길도 없는가 하면 모든 언설(言說)을 벗어나

삼계(三界)를 뛰어넘어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깨닫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희론(戱論)도 없고 물음도 없고, 보임도 없고

문자(文字)도 없고 언어의 길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보리자양론》은

「비록 청정한 천이(天耳)로써

멀리까지 모든 음성을 듣는다 해도

지혜로운 자는 소리는 언설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통달하여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만법이 어디로 돌아가는냐고 묻는

그 스님에게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라고 답하는 것은

법성의 자제함을 비유로서 방편을 쓴 것입니다.

아마도 덕산스님이라면 방맹이를 들었을 것이고,

임제스님이라면 <할>하고 고함을 내질러 겠지요.

 

청주(靑州)는 산동성(山東省: 중국인은 산둥성이라함) 청주이며

조주가 태어난 곳입니다. 산둥의 기후는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띈

특성을 지닌 곳이라고 합니다. 삼베옷이 7근(斤)이 되니

가벼운 여름용 옷이 아닌 두터운 겨울용 옷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주가 답한 그때 그 계절을 유추해 보면

겨울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추운 날씨에 두꺼운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는 <끽다거(喫茶去)>의 화두와 같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의 마음으로

그렇게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經)을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리불이 문수사리에게

“ 당신은 보리를 증득했다면 중생들에게

어떻게 설했는지 말해 보라”고 묻습니다.

이는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문수사리가 사리불에게 답하였다.

“보리란 실로 얻지 못함이라.

내가 어찌 어떠한 법을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얻게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보리와 중생은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다른 것도 없고 작위도 없고

이름도 없고 바탕도 없어,

실로 있는 바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설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가 만약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물러서

능히 이렇게 설한다면 곧 이것은 생각이 있음이요,

곧 나란 생각에 머무는 것입니다.

만약 생각이 있어서 나란 생각 가운데 머문다면

반야바라밀은 곧 처소가 있음이요,

반야바라밀이 만약 없는데 머문다면

또한 이것은 나란 생각이요,

또한 처소(處所)라고 이름할 것이며,

이 두 곳을 떠나 머물 바 없는데 머문다면

모든 부처님이 편안히 적멸에 처함과 같아

생각하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부사의 함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하며, 반야바라밀이 처한 곳은

일체법은 모양이 없고 일체법은 지음이 없으며,

반야바라밀은 곧 부사의요, 부사의는 곧 법계입니다.

법계는 곧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 곧 부사의요,

부사의는 곧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반야바라밀과 법계는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둘이 없고 다름이 없음이 곧 법계요,

법계는 곧 모양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

곧 반야바라밀의 경계입니다.

반야바라밀의 경계[般若波羅蜜界]가

곧 부사의 한 경계[不思議界]며,

부사의의 경계가 곧 생김이 없고

멸함이 없는 경계며, 생김이 없고 멸함이 없는 경계가

곧 부사의의 경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만법(萬法)은 생한 것이 아니니 멸할 수도 없습니다.

보리심은 차별 없는 모습입니다.

이른바 짓는 바가 없으니 무위(無爲)이기 때문이고,

시초가 없으니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다함이 없으니 멸함이 없기 때문이고,

물들어 더러워짐이 없으니,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법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지혜로 아는 바이니,

일체법이 무아(無我)이고

일미(一味)의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성게》에서 법성은

원융(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고,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공적(空寂)하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법성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량(思量)으로는 알 수 없고

오로지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란 이를 일깨우기 위한

법문임을 숙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