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대각사와 백용성 대종사
2024. 10. 19. 13:32ㆍ국내 명산과 사찰
대각사(大覺寺)는 3.1운동의 성지로
독립운동가 였던
백용성(白龍城, 1864~1940) 대종사가
1912년에 창건한 절이다.
대각사(大覺寺)는 종로 3가 전철역 3번 출구를 나와
진행 방향으로 3~50m 정도 걸다 보면 우측에 있다.
대각사 조금 아래쪽에는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 봉화의 불이 붙여진
유서 깊은 곳으로 알려진 현 파고다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용성 대종사께서는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군(현재 장수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수원 백씨(白氏)로 태어났다.
속명은 상규(相奎)이며, 법명은 진종(震鐘),
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현재 그의 생가인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2길 32에 기념관과
죽림정사가 세워져 있다.
스님의 승탑과 탑비는 합천 해인사에 조성되어 있다.
스님은 7세에 한학을 익혔으며, 9세에는 시를 지었다 하며.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으며,
23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그 뒤 보광사, 송광사, 마곡사 등을 비롯하여
전국 각 사암을 찾아다니면서 수도 정진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을 맞이한 선사는 산중 수행을 정리하고
1911년 48세 되던 해에 서울 서초구 서초동
우면산 대성사에 오신 이후,
다시 종로구 봉익동에 민가를 구매해서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大覺寺)의 간판을 내걸고
불교중흥과 민족중흥을 발원하여
불교계의 혁신 작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사대문 안의 유일한 사찰
각황사(覺皇寺, 현재 조계사)를 거쳐
종로구 봉익동에 있는 신도의 집에서
도시 포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민가
포교당의 효시로 보이며
그 후 스님이 머물렀던
봉익동 민가를 헐고 창건한 것이 지금의 대각사이다.
한용운 스님과 함께 3.1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12년 범어사, 통도사 등이 연합해
서울 대사동(인사동)에 조선 임제종(臨濟宗)
중앙포교당을 열었는데 그때 한용운 스님이
주무를 담당하고, 백용성은 포교 책임자가 되어
설교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서울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참선(參禪)의 개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백용성과 한용운은
훗날 3·1운동 때 불교계 대표 2인으로
나란히 참여하게 된 것이다.
3·1운동 때 태극기 사용을 제안한 분도
용성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 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4번째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한문으로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1922년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만주에 간 독립군들을 도우려고
만주 연길 명월촌과 봉년촌에
대규모의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62세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조직하여
수행에도 전력하기도 하였으며,
1926년에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의 하나로 시행하고 있던
왜색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건백서(建白書)를 2차에 걸쳐서 제출하여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1927년 64세 때에는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권세가(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찬불가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에 일요 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 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2곡만이 악보까지 남아있으며,
그외에는 가사만 전하고 있다.
같은 해 함양에 화과원(華果院)을 만들어
사원경제의 자립을 부르짖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후 30여 가지의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30여 가지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2월 24일 대각사에서 입적하니
세수는 77세이고, 법납은 61세였다.
한국 불교의 근대화와 조국의 독립에 주력한 백용성 스님은
조계종 스님의 절반이 그의 문도라고 할 만큼
큰 영향력을 끼쳤다. 동산, 고암, 인곡, 동암, 동헌
, 자운, 운암, 혜암, 소천 등 이른바
구제(九第)를 두었고 법손(法孫)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동산의 제자인 성철(性徹, 1912~1993) 스님도
용성스님의 법손(法孫)이라고 한다.
<용성선원>
@용성스님은 현대 불교 사업으로 어린이 포교,
일요 학교 설립, 시민선방 개설과
생활선(禪)을 강조하였는데
선의 대중화 시대를 연 곳이 바로 이 용성선원이다.
스님은 직접 풍금을 치면서
작사·작곡한 찬불가를 불렀다고 한다.
곧게 자란 솔나무는
그림자도 굽지 않고
빈 곳에 메아리는
소리 좇아 대답하오.
용성대종사는 우리나라에서
찬불가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국악조의 창작국악으로 된
창작찬불가를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대각사대각회사적기
<대각교>
1926년 5, 9월 두 차례에 걸쳐 총독부에 승려가
아내를 얻고 고기를 먹는 행위를 반대한다는
건백서(建白書)를 냈지만 거절당했다.
스님은 “곡식으로부터 나와서 곡식을 해침은 벌레요,
불법(佛法)으로부터 나와서
불도를 해치는 자는 중(衆)”이라며
계율을 엄격히 지킬 것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듬해(1927년) 용성스님이 조계종 안에 독자적으로
개설한 단체가 대각교이다.
대각사의 당우로는 단출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범종각이 있고,
본당은 3층 건물로 1층은 용성선원과 종무소를 겸하고
3층에 대각성전을 조성했다.
그 옆에 심금당이 있고
그 앞에 <대각사대각회사적기>가 있다.
심금당은 요사채를 검하고 있다.
@용성진종(龍城辰鍾)선사 (1864~1940) 열반송으로는
2개가 회자하고 있는데.
대개 열반송이 그렇듯,
이도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라서 다른 모양이다.
諸行之無常(제행지무상)
萬法之俱寂(만법지구적)
匏花穿離出(포화천리출)
閑臥麻田上(한와마전상)
모든 행이 무상하고
모든 법이 적적하여라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아가
삼밭에 한가로이 누웠나니
*匏: 박가지 포
@열반송
山山水水爾形(산산수수이형)
花花草草爾意(화화초초이의)
等閒來等閒去(등한래등한거)
明月照淸風拂(명월조청풍불)
산은 산대로 물을 물대로가 그대의 형상이요
꽃은 꽃 풀은 풀 그대로가 그대의 마음일세
한가롭게 왔다가 한가로이 가는 인생
달은 밝고 바람은 맑게 불어오네
* 拂(불);닦다, 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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