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2024. 9. 29. 14:28ㆍ경전과교리해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란
《금강경》 <제10품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말로
불가(佛家)에서 두루 알려진 말이다.
이는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낸다”라는 의미인데
머무름이란 집착을 말함으로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낸다는 것은 집착하는 바가 없이
마음을 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분별심>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개의 해설을 보면 단순히
<분별하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무언가 허전하다. 왜냐하면 마음의 작용인
과(果)만 말하고 그 마음을 일으킨
인(因)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에서 말한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을 말하는 것가를 살펴보자.
이는 간략히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證)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반야경>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행이요,
아뇩다라삼먁사보리심 즉 보리심을 행하는 마음을 말한다.
먼저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대하여 살펴보자.
무생법인(無生法忍)은 간략히 무생인(無生忍)이라 한다.
무생법은 생멸을 여읜 진여(實相)의 이체(理體)를 뜻한다.
참 지혜(眞智)는 理體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음으로 무생법인이라 한다.
생멸(生滅)을 여의었기에 부동(不動) 적멸하다는 의미다.
<주(註)유마경一>은
< 無生忍은 不起法忍이며 法忍은
곧 지혜의 본성(慧性)이다.
법이 생함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見法無生)은
心智가 적멸하고 감수(堪受)하여
물러나지 않으므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라고 했고, <지도론73>은 <이 무생법을 얻으면
모든 업행(諸業行)을 짓지도 아니하고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를 무생법인이라 한다.>라고 했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 스님이 육조 혜능 선사로부터
인가받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스님은 『열반대경(涅槃大經)』을 보다가 깨우치고 난 후
조계(曹溪)로 가서 6조(祖)대사의 인가를 구하였다.
스님은 도착하던 날 마침 6조대사가 법상(法床)에 앉아
법문을 하고 있는데 선상(禪床)을 세 번 돌고
석장을 한 번 내리치면서 그 앞에 우뚝 섰다.
육조(六曹)가 말했다.
“무릇 사문은 3천 가지 위의[三千威儀]와
8만 가지 세행[八萬細行]을 갖춰서
하나하나의 행(行)에 이지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대덕(大德)은 어느 곳에서 왔기에
크나큰 아만(我慢)을 일으키는가?”
스님이 말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중대하니,
무상(無常)하고 신속합니다.”
6조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무생(無生)을 체득해서
신속함이 없는 도리를 깨치지 못하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체득하니 곧 무생이라서
본래 신속함이 없음을 요달했습니다.”
6조가 말했다.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잠깐 사이에 예를 올리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6조가 말했다.
“돌아가는 일이 중대하고 신속한 것이더냐?”
스님이 대답했다.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 신속함이 있겠습니까?”
6조가 물었다.
“움직이지 않음을 누가 아는가?”
스님이 말씀드렸다.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分別)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6조가 말했다.
“그대가 무생의 뜻[無生意]를 깊이 체득했도다.”
스님이 대답했다.
“무생인데 어찌 의식[意]이 있겠습니까?”
6조가 말했다.
“의식이 없다면 어떤 것이 분별을 일으키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분별하더라도 의식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6조께서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육조스님이 이와 같이 인가(印可)를 하고
그가 깊이 깨달은 것을 찬탄하자
곧바로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하였는데,
6조가 잠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기 때문에
일숙각(一宿覺) 스님이라고 후대에 이칭(異稱)이 따랐다.
육조가 질문한 “움직이지 않음을 누가 아는가?”라는 말은
“자타(自他)”에 대한 물음이고
“분별하더라도 의식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답한 것은 “심의식(心意識)”을 벗어났다는 의미다.
자타(自他)가 없으니, 안과 밖이 없고,
또 심의식을 벗어났으니
그 행에는 염정(染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해도 분별이 아니고,
행(行)해도 행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보리심의 무주(無住)요 무작(無作)을 말하는 것이다.
보리심으로 행하는 마음을 보자.
반야경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 행>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행>이며
이는 곧 <보리심의 행>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심의식(心意識)을 떠난 분별은 어디서 오는가?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은
이렇게 설한다.
「만약 마음으로써 얻는 것이라면
마음이란 뭇 인연을 따라 나며,
뭇 인연을 따라 나기 때문에
공(空)함이 환(幻)과 같아서 처소도 없고
모양도 없고 성품도 없고, 또한 존재하는 것도 없다.
이 가운데 보리를 얻는 것이란
그 법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인 만큼
이 법은 다 공한 것이며, 다만 명자가 있어 세속 때문에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다 기억해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일 뿐, 실상 아무것도 없어
근본도 없고 형체와 모양도 없고, 느낌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하나의 형상[相]이니, 여읠 것도 없어서
이른바 상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법 가운데
법을 얻은 이도 없고 법을 쓸 것도 없고,
또한 보리란 것도 없다.
이와 같이 통달한다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리라.’라고 했다.
무상(無相), 무주(無住) 등
일체 사 량 분별심을 떠났다는 의미다.
보리심을 행하는 그 보리의 상(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경은 이어서 설한다.
「“문수사리여, 보리의 상이란 삼계를 벗어나
세속의 법을 뛰어넘어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므로
내거나 내지 않는 것이 없는
그것이 바로 보리심을 내는 것이니라.
문수사리여, 이 때문에 보살은
내는 것이 없이 보리심을 내어야 하리니,
내는 것 없는 그것이 곧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보리심을 낸다는 것은 법의 성상(性相) 그대로이고,
진리의 경계 그대로인지라,
분별하는 것도 없고
몸과 마음에 반연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이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아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는
이것이 보리심을 내는 것이니,
마치 거울 속의 영상과 같고 뜨거울 때의 화염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물속의 달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리심을 내어야 하리라.”」
라고 했다.
@경(經)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의 행을 살펴보자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법이 생김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생김이 없는 까닭이며,
만약 법이 머무름을 얻지 못하면
이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모든 법이 여실한 까닭입니다.
만약 멸함을 얻지 못하면
이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적멸한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색(色)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나아가 알음알이[識]에 이르기까지를 얻지 못하면
이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허깨비[幻]와 같고
번뇌와 같은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눈을 얻지 못하면
이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나아가 뜻에 이르기까지를 얻지 못하여도
이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만약 색에서부터 법에 이르기까지를 얻지 못하며,
눈의 경계ㆍ색의 경계ㆍ
안식(眼識:눈의 알음알이)의 경계를 얻지 못하며,
나아가 법의 경계ㆍ의식(意識:뜻의 알음알이)의 경계에
이르기까지를 얻지 못하면
이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만약 욕계를 얻지 못하면
이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나아가 무색계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라고 했다. 여기서 얻는 것은 사랑분별을 의미합니다.
《금강경》에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심(淸淨心)을 내어야 한다.
결코 색(色)에 사로잡힌 마음을
내어서도 아니 되고(不應住色生心),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사로잡힌
마음을 내어서도 아니 된다.
사로잡힌 데가 없이(應無所住)
그 마음을 내야 한다(而生其心)고
말한 것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법은 번뇌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생기거나 머물거나 멸함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더러운 법이나 깨끗한 법을 보지 못하고,
생사의 과(果)를 보지 못하고,
열반의 과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모은다는 뜻이며, 뜻이란 기억한다는 뜻이며,
의식이란 현재에 안다는 뜻이니,
이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로써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써 수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수행이고,
아무런 처소 없는 것으로써 수행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는 의미입니다.
수행이란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에 의지하지 않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안팎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니,
이러한 수행이 곧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밝게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어디에도 의지하지 말라.
나를 나의 소유라고 말하지 말고,
처소를 세우지도 말며, 생각하지도 말고,
최고의 경지[畢竟]를 짓지도 말며,
무엇을 한다는 대상을 두지도 말고,
자기의 몸이라고 말하지도 말며,
우리와 나의 존재라고 말하지도 말고,
과거를 기억하지도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일체의 온갖 법이
마치 텅 빈 허공[虛無]처럼
머무는 데가 없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란 말을
단순히 <분별심을 내지 마라.>던지,
<집착하지 말라>,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홀가분하게 행동하라,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늘 하는 대로 행하라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네 진심(眞心)을 바로 알고
그 마음이 짓는 바 그래도 행하라」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법의 성상(性相) 그대로 행하라.
그것이 곧 진리의 경계 그대로이니
분별심을 내지도 말고 몸과
마음에 반연하는 것도 없이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라밀행을 행하라,
보리심의 행을 행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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