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 제2구 절학무위한도인

2024. 6. 29. 09:43증도가

 

배움이 끊어져서 작위함이 없는 한가로운 도인은

망심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原文] 絶學無爲閑道人 (절학무위한도인)

不除妄想不求眞 (부제망상불구진)

 

배움이 끊어졌다(絶學)라 함은

계(戒), 정(定), 혜(慧) 삼학 수행을 다 마쳐서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스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글자로 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드러난 글자(字句)에 그 뜻(意)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숨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절학(絶學)의 의미를 살펴보자. 닦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는 대상이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상대적이기 때문에 닦을 것이 있고,

따라서 있기 때문에 닦아서 끝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계정혜(戒定慧)는

유위법에서 말하는 삼학(三學)이라는 것이다.

무위법(無爲法)은 닦아야 할 것도 끊어야 할 것도 없기 때문에

무위(無爲)이다. 영명(永明)선사는 <유심결(唯心訣)>에서

이를 일러 『견성(見性)을 한 자가 한가도인이다.』이라고 했고,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주석서는 고려 후기 승려 서룡이 송나라 화상

남명천의 「증도가남명천선사계송」을 풀이하여

1248년에 간행한 주석서이다.

 

『배움을 끊는다는 것[絶學]은 세간의 학문이 끊어지고

무위(無爲)의 학문을 배우는 것이다.

세간의 학문은 생사를 벗어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무위의 배움이란 소승의 유위(有爲)가 아니라

대승의 무위(無爲)에 들어가는 것이다.

소승의 유위(有爲)는 구경(究竟)이 아니다.

반야(般若)를 배우는 보살은 법(法)에 그윽하게 계합해서

일체법(一切法)에 응당 머무는 바가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어서 대자재(大自在)를 얻으므로

작위(作爲)한다 해도 작위함이 없으니,

이 때문에 ‘세간의 학문이 끊어져

작위함이 없다[絶學無爲]’라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작위(作爲)함이 없다는 말은 할 일이 없다는 의미다.

 

영명(永明) 선사는 <유심결(唯心訣)>에서 이를 쉽게 풀어

『비록 뒤에 닦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임을 먼저 깨쳤기 때문에,

악(惡)을 끊음에 있어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善)을 닦음에 있어 닦아도 닦음이 없어야

이것이 참다운 닦음이고 참다운 끊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온갖 행을 다 닦으나

오직 무념(無念)으로 근본을 삼는다.’』 라고 하였다.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곧 무위법(無爲法)이란 말이며

이를 깨닫는 것을 선(禪)에서는 불성(佛性)을 깨닫는다고 말하며,

또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구경각(究竟覺) 곧 일체 상대적인 것을 벗어난

무주(無住), 무상(無相), 무아(無我)의 경지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오로지 증(證: 깨달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경지에 오른 사람을 한가도인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명천화상은 동 주석서에서

『한가로운 도인[閑道人]은 도(道)와 서로 상응해서

번뇌의 진로(塵勞)에 구속되거나

얽매임이 없으므로 한가롭다[閑]고 한다.

진실로 모든 중생은 무시(無始)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합치했기[背覺合塵] 때문에

모든 목전의 경계에 대해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모든 육진의 경계를 쫓아가면서 잠시도 버림이 없으니,

어떤 것을 말미암아서 생사를 벗어나 여읠 수 있겠는가?

도를 배우는 사람[學道之人]은

능히 만물(萬物)을 굴릴 수 있지 만물에 굴려지지 않기 때문에

눈앞에 천 갈래로 차이 나는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한가로운 하나의 경계일 뿐이라서

물가나 숲 아래서 *성태(聖胎)를 길이 기르고,

달빛을 보며 소요하고 샘물 소리를 들으며 자제(自在)한다.

이 때문에 ‘세간의 배움이 끊어져서

작위함이 없는 한가로운 도인’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성태(聖胎):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의 삼현의와

성인(聖人)이 될 인(因)을 말하는 것이니

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자로서 인(因)을 삼고

좋은 벗으로서 연(緣)을 삼아서 정법(正法)을 듣고

수습(修習)하여 본성을 길러 초지(初地)에 이르러

견도(見道) 하나니 불가(佛家)에 태어난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어서

<망상도 제거하지 않고

참 성품도 구하지 않으니[不除妄想不求眞]>라고 한 것이다.

 

『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허망한 상념[虛妄想念]이다.

진실로 모든 중생은 하루 24시간 내내

경계를 반연(攀緣)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心]은 물을 생각하는 거북이와 같고

의(意)는 바람을 맞이하는 말과 같아서 쉬거나 그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범부(凡夫)라고 한다.

참 성품[眞]이라고 하는 것은 즉 하나의 참된 불성[一眞佛性]이다.

지금, 이 도인(道人)은 법과 서로 상응해서

범부와 성인[凡聖]의 두 가지 길에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이승(二乘)과도 구별되어서 다르다.

소승인은 세간의 생사를 싫어해서 여의고

계(界)를 벗어난 열반을 원하여 얻기를 바라지만,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만법을 회통해서

자기에게 귀의시키기 때문에

“망상도 제거하지 않고 참 성품도 구하지 않는다”라고

남명천화상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위의 이 마음은 어떤 것인가?

 

부대사(傅大士) 이에 대하여 설하시길

『지자(智者)는 방심(放心)하여 자재하다

심왕(心王)이 공무(空無)의 체성(體性)이라고 말하지 말지니

능히 색신(色身)을 부려 작사(作邪)하고 작정(作正)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이며, 은현(隱顯)이 부정(不定)이니

심성(心性)은 공(空)을 여의어

능범능성(能凡能聖; 능히 범성이 됨)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지자(智者)는 불성(佛性)을 증(證)한 사람,

선(禪)에서의 말하는 구경각을 증(證)한 사람을 가리킨다.

심왕(心王)은 만법의 근원이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에

심왕(心王)이라 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본래 마음이니

공(空)도 아니어서 일체 유무(有無)를 논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진불성(一眞佛性)을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영명 대사는 “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쓴다는 말인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自眼)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면서 (이미 있는 이 눈을)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째서 다시 보려고 하는가.

만약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신의 영지(靈知)도 역시 그와 같아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째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며,

다만 알 수 없음을 알면

이것이 바로 견성(見性: 성품을 봄)이다.’』라고 했다.

 

이 견성(見性)을 소승불교도들은 열반(涅槃)으로 여기고

열반(涅槃)은 오로지 수행으로서만 갈 수 있는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대승불교들은 <네가 거기에 있는데 왜 거기로 간다고 하느냐?>하였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닦아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대 마음(心)을 바로 보면 족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달마대사가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이를 가르켜

<네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 라고 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다.

 

본문에서 망상도 버리지 않고 참됨(眞)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스스로가 깨닫는 수행은 따지는 데 있지 않고,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된 사람이다.’라는 의미가 되는 데

이는 통달한 이의 경지에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은

애써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무위(無爲)라서

어떤 특별한 때도 없다는 의미다.

선후(先後)를 따진다는 것은 배워서 익혀 끊는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망상(妄想)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고

진(眞)을 찾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즉)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에도 그러하고,

똥 누고 오줌 눌 때도 그러하고, 남과 이야기할 때도 그러하고,

내지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언제든지 낱낱이 그러하다는 의미다.

 

비유하자면 마치 빈 배가 물결을 타고 올랐다 내렸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을 돌아나갈 때 굽이를 만나 돌아가기도 하고

곧은 곳에서는 바로 흘러가기도 하듯이

마음 마음이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망상(妄想)이 있고, 진(眞)이 있겠는가.

그르므로 오늘도 활달하게 자유롭고,

내일도 활달하게 자유로워서 온갖 반연을 따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고,

선악을 끊거나 닦는다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고

선사(禪師)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구에서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이어지는 것이다.

 

@사진: 항주 영은사와 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