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9. 21:49ㆍ국내 명산과 사찰
마이산기행(1/6) 남부주차장에서 고금당(古金堂)으로
@마이산은 두 개의 큰 산봉우리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으므로 용출봉(湧出峰)이라 하였고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였으며, 신라 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 불렀으나
조선 시대 태종이 남행(南幸)하여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지금은 속칭으로 동쪽을 수마이산(680m), 서쪽을 암마이산(686m)이라고도 한다.
@마이산의 등산코스로 가장 잘 알려진 주요 봉우리는
광대봉, 고금당이 있는 탄금봉, 비룡대가 있는 나옹암, 봉두봉
그리고 암마이산과 숫마이산이다. 숫마이산은 현재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
@마이산 오르는 길은 여러 들머리가 있지만,
이번 산행은 * 남부주차장 → 고금당 → 비룡대(전망대) → 성황당 → 봉두봉에서 암마이산 → 천황문
→ 은수사 → 탑사→금당사→남부 주차장으로 원점회귀선으로 택했다.
마이산에는 나옹화상이 수도했다는 고금당을 비롯하여,
조선 시대 태조가 임실군의 성수산에서 돌아가다가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은수사,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80여 개의 돌탑을 거느린 탑사와
금당사라는 사찰이 관광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마이산기행은 전부6부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마이산 남주 주차장에 입구에 일주문이 서 있다. 금당사의 일주문이다.
금당사는 여기서 20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다. 약사여래가 방문객을 맞는다.
원점회귀하는 등산 코스라 금당사는 마지막 코스로 들리기로 했다.
약사여래 뒤편 길은 식당가다. 고금당은 식당가에서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식당가에서 고금당까지는 600m 정도로 가까운 거리지만 가파른 길이 연속된다.
고금당 가는 들머리 입구의 계곡에서 바라 본 풍경이다. 저 멀리 비룡대가 보인다.
조금 이른 아침인데도 마이산의 늦은 단풍 색이 여리게 눈에 들어 온다.
망원으로 잡아 본 비룡대 전경
계곡을 들어서서 조금 오르니 이런 플랭카드가 보인다.
고금당이 있는 봉오리가 탄금봉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고금당의 매력은 비룡대나 봉두봉 쪽에서 바라 보면 산 능선에 황금빛 지붕이 보인다.
옛적 마이산을 등산할 때 어느 사찰의 암자인지,
연구소나 수련원이 아닐지 하는 궁금증을 느꼈던 곳인데
이제 알고보니 고금당이란 암자였다.
또한 나옹화상이 이곳에 수도했다는 나옹굴이 있음을 이번 등산에서 알게 되었다.
부도를 만났는 데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었다.
부도의 색깔을 보아 오래된 것은 아니고 아마 최근에 조성한 모양이다.
@고금당(古金堂)이 보인다. 고금당은 금당사(金塘寺)의 옛터로
예전에 금당사가 있던 자리를 고금당 혹은 자연 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자연 동굴은 나옹암(懶翁庵)으로 불리는데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의 수도처이기도 하다.
나옹선사는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으며 보우, 무학 등 높은 제자가 많다.
고금당은 멀리서 보아야 암자로서 운치가 난다.
비룡대 쪽에서 바라 본 고금당
망원으로 잡았 본 고금당의 풍경
높은 산은 아니자만 고금당은 수직 절벽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나옹굴에서 고금당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시멘트계단이다. 계단 아래에 산신조각상이 보인다.
나옹굴의 전경이다. 아담하게 꾸밀려고 무척 애쓴 보람이 보인다.
@멀리는 소요산 자재암이나, 부산 기장의 해동 용궁사 등 사찰을 다니다 보면
사찰에서 회자하는 시를 볼 수가 있다.
나옹화상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시는 기억이 날 것이다.
이 시의 저자가 바로 나옹화상이다.
懶翁禪師 詩(나옹선사 시)
靑山見我無語居(청산견아무어거)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視吾無埃生(창공시오무애생)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貪慾離脫怒抛棄(탐욕이탈노포기) -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水如風居歸天命(수여풍거귀천명)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石羅漢(석나한)/나옹화상
그 몇 겁을 이곳에서 보냈음이리?
深山의 석굴에서 아직 空에 취해있네
그대여, 어서 빨리 머리를 돌려
최상승의 관문을 바로 뚫어라.
自在逍遙經幾劫(자재소요경기겁)
深山石窟愛觀空(심산석굴애관공)
勵君早早廻頭去(려군조조회두거)
最上門中驀得通(최상문중맥득통)
나옹굴을 나와 고금당에서 비룡대와 주변을 조망해 본다
암마이산이 조망되고 산은 단풍이 물들어 있다. 숫마이봉은 여기서 조망이 되지 않는다.
저 멀리 좌측에 금당사도 보인다.(금당사는 6부에서 포스팅한다)
금당사를 포커싱해 본다.
나옹화상의 본명은 혜근(惠勤: 1320~1376년)으로 고려의 승려이다.
나옹(懶翁)은 그의 호가 된다.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법호는 보제존자(普濟尊者)이며
영해부(寧海府: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출신이다.
나옹 혜근은 1347년(충목왕 3)에 원(元)의 연경에서 지공(指空)선사의 법을 계승하였다.
공민왕 때 고려로 귀국해 회암사의 주지가 되고 왕사(王師)로 봉해졌으며
보제존자라(普濟尊者)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나옹 혜근은 1340년(충혜왕 1)에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了然) 스님에게 출가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묘적암에는 나옹화상 진영이 봉안되었다.
1376년(우왕 2년)에 낙성(落城)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혜근은 밀양시의 영원사(靈源寺)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병이 도졌다. 한강에 이르렀을 때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결국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 경기도 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
탁첨(卓詹)이 재촉해 다시 떠나자고 말했지만 떠나지 않고
음력 5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조용히 입적(入寂)했다.
阿彌陀佛(아미타불)/나옹화상
과연 아미타불 어디 계시랴.
마음에 이를 얻어 잊지 말아라.
골똘한 생각 끝에 무념 되는 곳
네 몸에서 자라황금 광명이리라.
阿彌陀佛在何方(아미타불재하방)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
念到念窮無念處(념도념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着得: 착은 의미 없는 조사. 얻는 것
.@心頭: 마음. 頭는 조자.
@切: 부디
@念到念窮: 생각이 갈데까지 다 이르는 것.
@紫金光: 紫磨黃金의 준말. 부처님의 광명을 뜻한다.
지장보살과 약사여래
신중탱
만월한광(滿月寒光)/나옹화상
허공을 쳐부수니 안팎 곧 없고
티끌 하나 없는 드러난 그것
몸을 뒤처 威音의 뒤를 뚫으니
보름달의 찬 빛이 破床 비치네
擊碎虛空無內外(격쇄허공무내외)
一塵不立露堂堂(일진불립노당당)
飜身直透威音後(번신직투위음후)
滿月寒光照破床(만월한광조파상)
@露堂堂: 똑똑히 드러남
@威音後: 법화경에 의하면 威音王佛은 최초에 나타난 부처님. 따라서 <위음후>란 태초 이후 즉 현상의 세계를 가리킨다.
@破床: 앉기도 하고 눕기는 하는 침대 모양의 것을 床이라 한다. 망가진 상
竹林(죽림)/나옹화상
萬頃琅玕檻前(만경랑간함전)
淸風四節送琴絃(청풍사절송금현)
此君鬱密通霄志(차군울밀통소지)
影掃階中塵自然(영소계중진자연)
만이랑의 대나무가 난간 앞에 닿아 이서
사철 맑은 바람 거문고 소리를 보내주네
울창하고 빽빽한 대나무 숲은 하늘 뜻과 통하고
그림자가 섬돌을 쓸지만 먼지는 그대로네
#此君: 대나무의 異稱. 중국 晉나라 때 왕희지가 대나무를 차군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는 부도가 바위 위에 조성되어 있다.
고금당을 둘러보고 비룡대로 나서는 숲길에 용왕상이 있다.
이로 보아 고금당 쪽은 물이 귀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첫 능선에 오르니 남부주차장이 조망된다.
이제 비룡대를 향한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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