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불령산 청암사

2018. 9. 29. 21:01국내 명산과 사찰




김천 불령산 청암사

 

김천 청암사(靑巖寺)는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불령산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다.

청암사는 원래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에 있다가 6·25

수도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방화로 소실된 조계사 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산내 암자였는데

1914년에 강원으로 승격되고 지금은 직지사의 말사로 소속된 사찰이다.

청암사는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기사환국의 여파와

장희빈과의 암투에서 폐위된 뒤 이곳에 잠행하여 복위를 빌었던 일로 유명하다.

극락전 남별당에 인현왕후가 머물렀다고 한다.

 

청암사는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道詵)이 처음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랫동안 내력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시대에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기사환국이라 일컫는

남인 서인 간의 알력과 장희빈의 모략으로 궁에서 폐출되어 쫓겨났을 때

이곳에 기거한 일이 있어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청암사가 위치한 불령산은 현재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사력(寺歷)을 보면 조선 중기에 의룡율사(義龍律師)가 중창하였고,

1647(인조 25) 화재로 소실되자 벽암(碧巖)이 허정(虛靜)을 보내 중건하였으며,

1782(정조 6) 4월 다시 불타자 환우(喚愚)와 대운(大運)20여 년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7(고종 34)경에 폐사되어 대중이 흩어졌으나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이어서 응운(應雲)이 보광전을 건립하다가 입적하자

대운(大雲)이 이를 받아서 완성하고 42()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119월에 다시 화재로 인하여 전각이 불타자

대운이 1912년 봄에 다시 당우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운당과 회당비각)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육화전(六和殿진영각(眞影閣정법루(正法樓일주문(一柱門

사천왕문(四天王門비각(碑閣객사 등이 있고,

계곡 건너 100m 지점에는 극락전(極樂殿보광전(普光殿

요사채 등이 있는 극락암(極樂庵), 범종각이 있다.

 

주요 지정 문화재로는 김천 청암사 아미타불회도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5,

김천 청암사 신중도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16호로, 청암사 대웅전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약 6m의 다층석탑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암사 보광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방 광목천왕/북방 다문천왕)  

육화전은 과거에 강원(講院)으로 이용되었던 건물이고,

지금의 범종각을 짓기 전에는 정법루는 종각으로 사용되었다.

 이 절 입구의 부도군에는 벽암대사의 사리탑을 비롯하여 태감(泰鑑지성(智性) 등의 공덕비가 있다.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또 일주문 안에는 사적비를 비롯하여 회당비각(晦堂碑閣)과 대운당(大雲堂)의 비각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로는 유명한 수도 도량인 수도암(修道庵)

1905년에 비구니 유안(有安)이 창건한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청암사는 직지사의 수사(首寺) 위치에 있는 사찰로,

사찰 내 승가대학과 율원(律院)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박한영이 머물며 강론하는 등 불교 강원으로 맥이 이어졌다.

 1987년에 청암사 승가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비구니 강원이 설치되었다.




청암교





부도













중앙에 보이는 전각이 보광전이다.


백화당은 보광전 좌측의 전각이다.


보광전 앞에 놓인 배례석







<보광전>은 정면 3, 측면 2칸이며 요사는 정면 4,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일세.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으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

 

희미하게나마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이 동요는 장희빈의 모략으로

 궁에서 폐출된 숙종의 비 인현왕후의 이야기로,

노랫말에 나오는 미나리는 민씨 인현왕후를, 장다리는 장희빈을 의미한다.

 

@숙종은 167413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후 46년 동안 재위했다.

숙종은 전후 3차례에 걸쳐 왕비를 맞이했는데

원비는 인경왕후, 둘째와 셋째 왕비는 인현왕후와 인원왕후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궁중 사극에서 널리 알려진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에서 대부호가 된 장경의 딸로 조선 왕조 최초로 역관 집안에서 왕비가 된 여인이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1689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지만, 병고에 시달려

1701(숙종 27) 8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고양의 서오릉에 있는 명릉(明陵)으로 훗날 숙종과 함께 합장되었다.

시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이다.




<관세음보살> 은 @관세음(觀世音) (Avalokitesvara) 또는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관음(觀音)이라 한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서원으로 하는 보살의 이름이다.

大慈大悲하여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우면 그 음성을 듣고 구제한다고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을 보면 이 보살은 극락정토에서

아미타불의 협시(挾侍)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는다고 한다.

 

관세음(觀世音)은 세간(世間)의 음성을 관()한다는 뜻이고,

관자재(觀自在)라 함은 지혜로 관조함으로 자재한 묘과(妙果)를 얻는다는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

자비를 위주로 하는 뜻으로 대비성자(大悲聖者),

세상을 구제함으로 구제대사(救世大師)라고도 한다.

 

이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며 삼십삼신(三十三身)이 있다고 한다.

왼 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며,

그 꽃이 핀 것은 불성(佛性)이 드러나서 성불한 것을 뜻하고

그 봉우리는 佛性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그 형상을 달리함에 따라 육관음(六觀音) 즉 성(), 천수(千手), 마두(馬頭),

십일면(十一面), 준제(準提), 여의륜(如意輪) 등으로 나누는데

그 중 성()관음이 본신이고 기타의 것은 보문시현의 變化身(변화신)이다.

관음보살이 머무는 淨土(정토)를 보타락가(補陀洛迦 potalata)라 하며

 중국에서는 절강성(浙江省)의 주산도(舟山島)를 보타락이라 한다.

(본방 보타낙가산 참조)


  

천개의 눈과 손을 가진 관음을 천수천안대비관음보살(千手千眼大悲觀音菩薩)이라 하며

 이를 줄여 부를 때 천수관음이라고 한다.

 탱화로 모실 때에는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리지만

조각상으로 모실 경우는 이를 묘사하기가 무리가 되어

대개 42를 묘사하게 되는 데 이를 <42수관음>이라고 부른다.

 42중 합장한 본래의 두 손을 뺀 40의 각각

 25의 중생을 제도함으로 40x25=1000이 된다.

 25는 욕계의 지옥에서 무색계(無色界)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의

육도중생을 25유로 분류한 것을 의미한다. 천수관음의 손에 든 각각의 지물(持物)

중생들의 갖가지 원()을 성취해 주기 위한 용구들이다.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과 신중탱






극락전 풍경이다. 극락전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극락전>은 정면 7, 측면 7칸의 팔작지붕이며 측면 2칸은 2층 누대를 설치한 복합 건물로 총 228이다.   


극락전의 마루에 놓인 동자상과 여래상




범종각


대웅전 가는 길의 좌측풍경


대웅전 가는길의 우측풍경



청암사 율원


대웅전 쪽에서 바라 본 범종각



<진형각>

진형각은 정면 5,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식이고 중현당은 정면 6, 측면 6칸의 팔작지붕으로 총 350이다.









다층탑 뒤편 전각은 정법루다. 정법루는 옛적에 종각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청암사는 불령산 아래 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2칸으로 총 76의 팔작지붕이며

 1976년에 청기와로 다시 이었다. 정법루는 대웅전 전방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5,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사천왕문은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집 건물이다.

요사인 육화료의 형태는 을자형(乙字形)에 귀틀을 지닌 건물로 정면 8, 측면 8칸의 팔작지붕이며 총 357이다.













대웅전에 모신 석가모니불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선정인은 석가모니불의 근본 5(: 선정인·항마촉지인·전법륜인·시무외인·천지인) 중의 하나로

삼마지인(三摩地印)이라고도 한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손 모양이다.


 

본래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참선, 즉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취한 손의 모습을 말하며,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모아 삼매경에 드는 수인이다. 고대 이래 인도의 수행자들에게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형식은 결가부좌한 자세에서 왼쪽 손바닥을 위쪽으로 하여 단전 앞에 놓고 오른손 손바닥도 위쪽으로 하여

 왼쪽 손바닥 위에 손가락 부분을 겹쳐 놓되 양쪽 엄지손가락을 맞대는 모습이다.

손등은 자연스럽게 결가부좌한 발 위에 얹는다.

이 자세는 주로 석가 불상에서 볼 수 있으나 석가만이 취하는 것은 아니다.

수인은 불상의 종류에 따라 교리상의 뜻이 다르므로 불상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는 하지만

불상의 존재를 결정짓는 근거는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