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21. 12:25ㆍ삶 속의 이야기들
삶이란 광자(狂者)의 유희인가? 아둔함의 춘몽(春夢)인가?
세상사람들에게 갖은 몰쓸 짓을 한 악인이라도 죽은 다음에는
그의 생전의 행위에 대하여 찬사는 보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묘지의 비문(碑文)을 남길 때는 미화시켜 주는 것이 사자(死者)에 대한 우리네 풍습이다.
선악을 떠나 사자(死者)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敬畏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의 전통을 보면 찬사도 미화도 아닌 허드레같은 소리를
비문(碑文)에 새겨 놓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문의 그런 짧은 말들 속에는
삶에 대한 깊은 고찰과 삶에 대한 경종(警鐘)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풍자와 해학 그리고 몽상가의 뚱딴지 같은 사건으로
한 때 세상을 풍미했던 세르반테스의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그 하나다.
그 소설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고향에 돌아가 죽음을 맞이할 때 산손 카르라스코가 작성한
돈키호테의 삶에 대하여 비문에 남긴 그의 마지막 글이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의미 깊은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미처서 살았고 정신들어 죽었다.」
어느 철인도 그랬던가. 미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아마도 이 말의 숨은 뜻은
제대로 미쳐야 목적을 달성한다는 의미 일게다. 허긴 지금의 세상은 광자(狂者)들의 유희판이니깐.
그런데 세속의 삶에서 오로지 그것을 쟁취하가 위해 미치는 그것이
진정 삶의 궁극적 의미에서 관조하면 의미가 있을까?
짧은 인생에 하루가 길어서 아등바등하면서 오욕(五欲)의 습(習)에 젖어서
신기루 같은 꿈을 쫓아가는 것이 마치 돈키호테가 늙은 노세 로시난테를 타고
풍차를 향해 돌진해 가듯 그렇게 쫒아가다가 끝나는 것과 정녕 무엇이 다를까.
바보들은 죽어야 깨어난다는 말과 같이 죽음을 앞에 둔 나이가 되면
그때야 이것들이 모두 무명(無明)의 허망한 꿈인 줄 알게 되는 인생.
돈키호테의 비문의 「미처서 살았고 정신들어 죽었다.」는 말이
이런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정녕 광자(狂者)들의 유희(遊戲)나 아둔한 자의 춘몽(春夢)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느 시골에 마음씨 착한 소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숫처녀로 늙어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를 치루면서 비문을 쓰려고 했는데
생전에 무엇하나 뚜렷하게 드러낸 것이 없어
어떻게 쓸까하고 주저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이렇게 쓰자고 했다.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체 죽었다.」
거시기에 털난 자라면 무슨 의미인 줄 담방에 알 것이다.
그런데 가치관(價値觀)이 혼탁하고 이념(理念)이 판을 치고,
부(富)와 명예, 탐욕으로 인생을 도배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의 숨은 뜻이 무명(無明)의 채바퀴를 굴리다가 끝나는 삶에 대한 일침임을
되새겨 볼 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붓다의 말처럼 눈을 뜨고 꿈을 꾸고,
눈을 감고 꿈을 꾸다가 한 세상 마감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중생들의 삶이 아니던가.
헛깨비같은 이 육신을 나로 알고 있는 그 무지(無智)로부터 벗어나고
부귀공명(富貴功名)이란 욕망의 물거품이요,
아침 이슬같음을 깨닫고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아
깨어 있는 삶을 살다가 가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망우리 묻힌 무덤들.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체 사라져간 저 망자(亡子)들의 한스러운 소리가 귀전에 들리는 듯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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