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무애암(無碍庵)

2017. 10. 28. 15:43국내 명산과 사찰




무등산 무애암(無碍庵)


무등산 규봉암을 가기 위한 사전 코스답사준비로 원효사를 들렸다가

원효사 입구에 무애암이란 암자 표시가 있어 들러 보았다.

무애암은 원효사에서는 500m 정도 거리였기에 거리도 멀지 않고

원효사의 말사인 듯하여 올라 온 김에 겸사겸사하여 둘러 본 암자다.

암자란 큰 절에 딸린 작은 절로서 수행자의 공양과 숙소를 위한 작은 공간만 있으면 족하겠지만

 대개는 그 절벽이나, 강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좋은 곳에 있어 볼거리도 되기 때문이다.



원효사를 나와 옆의 오솔길을 따라 가면 무애암이 나온다.

원효사로부터 거리는 500m 정도라 가깝게 여겼는데가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무애암은 요사채를 제외하면 대웅전 밖에 달리 전각이 없다.

대웅전은 아직 외곽 단청뿐만 아니라 법당에 모신 불상들 조차 도금이나 칠을 입히지 않은 상태였다.

법당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봉안된 삼존불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연등보살과

반가사유상을 한 미륵불을 협시불을 모시고 있다.

삼존불의 의미를 새겨보면 현재불인 석가모니불고, 과거불인 연등불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신 것으로 보이는데 법당에 반가사유상을 한 미륵보살을 모신 것이 특이하다.

불상 뒤에는 석가삼존후불탱화와 신중도, 지장후불도 봉안되어 있는데

삼존불과 후불탱화는 송근영 조각장과 김현자라는 두분이 1년 여의 조성 기간을 거쳐 완성했다고 한다.

아직 불사 중이라서 그런지 암자의 내력을 더듬어 볼만한 자료가 없어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협시불로 모신 연등불(燃燈佛)은 범어로는 디팜카라(Dipamkara)인데

정광여래(定光如來). 등광(燈光)여래. 보광(普光)여래. 정광(錠光)여래 등으로 의역한다.

음역으로는 제화 갈라 (竭羅).제원갈(提洹竭)로 표기한다.

과거세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에게 수기를 준 부처님으로 유명하다.



 

연등불의 이야기를 경전에 보면 과거 일월등명불에게는 여덟 명의 왕자가 있었다.

그 중 법의라는 막내 왕자가 바로 이 연등불이다. 라고 한다.

증일아함경 제13권 제1에 이 부처님의 본연(本緣)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과거 구원겁에 왕이 있었다. 이름을 지주(地主)라 했다. 장차 염부제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왕에게는 선명이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왕은 염부제의 반을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다.

선명이 왕이 되었으며 일월광(日月光)부인과의 사이에서 등광(燈光)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태어날 때 염부제가 돌연 금색으로 변했고 용모는 단정하여 32상을 갖추었다.

29세에 문득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다. 부왕인 선명왕은 40 억의 남녀와 함께

등광불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해 법문을 들었고

이 부처님도 또한 지주왕이 있는 곳에 이르러 왕과 신하와 백성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였다.

왕은 그 후 7만 년 동안 사사(四事)로써 등광불과 비구들을 위해 공양하고

여래가 멸도하자 다시 7만 년 동안 부처님의 사리에 공양을 하였다.

이러한 인연공덕으로 나중에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도를 깨달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된다는 얘기다.


 

또 이외에도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얘기는 상당히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 유동보살로서 인위(因位)를 닦을 때

일곱 송이의 연꽃을 연등불에게 공양하였는가 하면

연등불이 온다는 갑작스런 말을 듣고 진흙길에 자신의 몸을 엎드려 밟고 지나가시게 한 인연도 있다.

또한 연등불이 오자 어린 유동보살은 소꿉장난하던 깨어진 기왓장에 모래를 담아 연등불에게 공양하였더니

연등불이 흔쾌히 받으며 수기를 하였다고 하는 매우 아름다운 설화도 전한다.

 연등불(Dipamkara)은 과거 머나먼 옛적에 출현하여 현재의 석가모니불에게

미래세에 반드시 성불하여 호를 석가모니라 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준 부처이시다.

정광여래(錠光如來) 또는 정광불이라고도 한다. 이를 음역하여 제화갈라(提和竭羅)라고 하며

또는 보살의 칭호를 붙여 제화갈라보살, 갈라보살 이라고도 한다.

즉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는 경우 좌우의 보처불(補處佛)로서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 들 중 석가모니불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 분이 미륵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불(世佛)로서 등장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협시불로 모셔져 있는 미륵보살상은 반가사유상을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을 법당에 모신 것이 다른 사찰과 비교하면 특이 하다.

반가사유상의 연원 및 변천을 살펴보면

반가사유상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 태자였을 때 인생무상을 느끼며 고뇌하던 모습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처음 등장하는데 불상의 좌우에 교각보살상과 함께 협시보살상으로 조성되었다.

중국의 경우 명문을 통해 태자사유상혹은 사유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나무 아래에서 혼자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표현되거나 이후 나무의 모습이 생략된 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자사유상으로 조성된 흔적 혹은 명문이 발견된 사례는 아직까지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반가사유상이 태자사유상보다는 미륵보살상으로 인식되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 야츄우지(野中寺)에 있는 반가사유상의 대좌에

 미륵어상(弥勒御像)이라 새겨진 명문의 영향이 가장 크다.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반가사유상이 역사적으로 미륵신앙과 관련을 보이며

중국 역시 석굴에 조각된 명문 없는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태자사유상과 마찬가지로 미륵보살상이란 명문이 발견된 예가 없으며

미륵보살로 확증할 만한 명백한 자료가 없어 최근에는 미륵보살반가상보다

반가사유상으로 그 명칭을 전환하는 추세이다.


동진보살을 중앙에 모신 신중도


치성광 여래를 모신 칠성탱



대웅전에 조망한 요사채전경


법당 오르는 길에 조성된 호랑이 조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