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6. 19:10ㆍ국내 명산과 사찰
부여기행(3/4) 정림사지(定林寺址)
고란사를 들리고 세 번째 들린 정림사지. 날은 여전히 흐리다.
정림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대표적인 백제시대 절터로 사적 제301호 지정되어 있다.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 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다량의 기와편,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사지에 대한 전면발굴이 이루어져서 석탑 주변도 조사되었다.
석탑의 주변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가람배치의 전모가 밝혀졌고,
일찍이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오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생각된다.
@이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하였다.
@이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세련되고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며,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보물 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 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 있는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다.
석불이 있던 절은 6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이다.
정림사는 이 절의 고려시대 이름인데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명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고려초에 절을 다시 세울 때 백제시대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부여군청>
@불상이 놓이는 대좌는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편이며,
처음 조성할 때부터 공을 많이 들인 것으로 보인다.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보물 제108호. 전체 높이가 5.62m에 이른다.
이 불상은 정림사지 경내 팔각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으며 국보 제9호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다.
현재 불상의 위치는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이며,
현지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고려시대에 절을 중창할 때 만든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이 있던 강당자리 인근에서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정림사라는 절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의자왕의 바둑판
금동관세음보살입상
발굴당시 머리부분이 파손된 여래상
위의 사진은 발굴당시 합장한 손부위(아래사진)만 남아 재현시킨 것이다.
목조로 제작한 금동대향로
귀경길, 이제 하늘이 푸른 빛을 띈다. fine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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