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이 좋다,

2008. 10. 19. 00:12잠언과 수상록

 

 

나는 산이 좋다,


나는 산이 좋다. 그래서 산을 간다.

풍상을 겪은 바위가 있는 산이라면 더욱 좋다.

어느 산인들 해묵은 바위가 없겠느냐 만은

그래도 세월의 傷痕을 지닌 바위를 만나지 못하면

돌아오는 길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암벽등산가는 결코 아니다.

그저 산을 즐기는 자일뿐

頂上의 쾌감을 즐기는 그런 정복자는 아니다.

 


비바람에 씻기고 파인 바위들을 만나면

파닥거리든 앙금진 삶의 생각들이 

그 상흔의 동굴 앞에서 산산이 부셔지고

침묵의 망치에 마음은 혼절의 늪으로 빠져 들어간다.


허무와 무상의 나락이 그 중후한 질감에 무색해지고

인고의 세월 그 침묵의 무게에 삶의 妙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산을 간다.

바위산을 간다. 참 이상한 魔力이다.

 

살아있기에 고통을 느낀다는 어느 시인의 말

죽음을 찬양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산을 오르면 그 참 의미가 조금은 이해가 간다.

허리와 다리 통증으로 밤을 지새웠던 지난 날

측은하게도 지하철 바닥에서, 대합실에서 

그 차가운 바닥에도 퍼드러지게 드러누운 노숙자들

흔들리는 차간에서 침 흘리며 졸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조차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죽은 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못할 테니.

 

 

그래서 그랬던가. 허깨비 같은 이 몸이 佛身이라고.

태어났으니 피할 수 없는,

삶이란 터널을 지나가야만 하는,

버리고 싶어도 쉬이 버릴 수도 없는

이 허망한 육신을 끌면서,

칠흑 같은 허무와 삶의 질곡에 갇혀

번뇌의 갈퀴에 할퀴고 찢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두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깊은 상흔을 딛고 침묵으로 서 있는

그 올연한 바위들을 마주하면

똑똑한 염세주의자 보다는

어리석은 낙천주의가 낫다는

어느 어설픈 철학자의 말이 문득 생각나

슬며시 수긍이 가서일까.

 

고통을 고통으로 알고 받아드린다면

그것은 이미 고통이 아니라는

저 바위들의 暗黙의 소리 탓일까.

 

 

삶이란 것도, 죽음이라는 것도.

바위 앞에 서면 말을 잊는다.

그래서 산을 간다. 바위가 좋아 나는 산을 간다.

 

(석양의 불암산에서.0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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