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능

2021. 6. 2. 20:54국내 명산과 사찰

 

 

공주 송산리 고분군(公州 宋山里 古墳群)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 (옛지명 송산리)

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475~538)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이중 7호분은 무령왕릉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5년에 충청권에서는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하에 시신을 매장하고

지상에 아무런 시설을 가하지 않은 것을 묘(墓)라고 하고,

반대로 지상에 흙을 쌓아 올려서 시설을 가한 것을 분(墳)이라고 하여

묘와 분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그러나 현대는 양자를 모두 묘로 통일하여 호칭한다.

 

고분의 지형상으로 보면,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고인돌[支石墓]과

돌덧널무덤[石槨墓]은 천변 낮은 언덕 위에 많이 만들어졌다.

고구려에서는 전기에는 하천변 또는 근거리의 평야지대를 선호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구릉상이나 산 중턱을 선호하였다.

백제의 전기 한성(漢城)에서는 평지에 주로 묘지를 설정하였으나

중기 이후 웅진(熊津)·사비(泗沘) 시대에는

고구려와 같이 구릉 또는 산의 중턱 남사면에 묘지를 많이 조성하였다.

 

송산리고분은 송산의 경사진 면에 조성되어 있고,

만들어진 형태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벽돌무덤[塼築墳]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웅진시대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부장품(副葬品)을 순수한 우리말로는 껴묻거리라 한다.

껴묻거리는 무덤에 시신을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품을 말한다.

이번 포스팅은 고분(古墳) 위조로 다루고

무령왕능에서 출토된 껴묻거리는 국립공주박물관에

그 원물이 전시되어 있기에 박물관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1)송산리 제1~4호분(宋山里 第1~4號墳)

공주 송산리 1호분(公州 宋山里 一號墳)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에 있는,

백제 중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실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의 하나이다.

 

남쪽으로 면한 구릉의 사면(斜面)을 파고,

직사각형 묘실을 활석으로 쌓고 벽면에 회칠을 했는데

천장은 안으로 좁혀든(內傾) 네 벽 위에 얹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배수구(排水構)가 연문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중앙을 지나 밖으로 뽑아지고 있다.

벽면에 휘장을 쳤을 것으로 여겨지는 못이 박혀 있는데

이러한 예는 함안(咸安)의 가야시대(伽倻時代) 고분에서도 볼 수 있어

서로 교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 전체적인 가구나 형식이 고구려의 분묘와 흡사하여

이러한 유의 고분형식이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남전(南傳)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 ~ 4호분은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1927년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이전에 이미 도굴됐다. 조사 당시 동서방향으로 5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는 4기만 복원되어 있다. 벽돌로 쌓은 묘실은

가로 세로의 크기가 거의 같은 정사각형의 형태이며,

남벽의 우측에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인 널길이 달려있다.

벽면과 천장에는 백회를 발랐으며, 바닥에는 자갈을 깔았다.

무덤에서는 금과 은, 금동으로 만든 껴묻거리가 일부 출토되어

웅진시대(475~538) 백제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2)송산리 5호분(宋山里 5號墳)

5호분은 1932년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되었는데,

1~4호분과 마찬가지로 굴식 돌방무덤이다.

널방은 남북 길이 3.45m, 동서 너비 3.26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3m 높이까지는 벽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쪽부터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후,

정상부에 판석 1매를 얹어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놓는 관받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굴로 인하여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못만이 남아 있었다.

 

3)송산리 6호분(宋山里 6號墳)

6호분은 무령왕릉과 함께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무덤으로 굴식 벽돌무덤이다.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7m, 동서 너비 2.24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였으며,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図)를 그렸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받침대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통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내부에는 벽화가 있다.

공주고보(현재의 공주고) 한문교사로 재직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 무단도굴하였다.

 

 

천장
천장의 벽돌에 그려진 무늬

 

 

 

 

 

 

 

4)송산리 7호분(宋山里7號墳) 무령왕릉(武寧王陵)

송산리 7호분은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501~523)과 왕비의 합장 무덤이다.

1971년 5호분과 6호분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덤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4.2m, 동서 너비 2.72m, 높이 2.93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등감(燈龕)과 창문 시설을 설치하였다.

특히 입구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은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또한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연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송산리고분군 있는 무덤 중에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품은 모두 108종으로 4687점에 달한다.

그중 국보로 지정된 것은 12종으로 17점에 달하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이들 유물의 출토로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무령왕 관꾸미개(금제관식): 국보 제154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 금제뒤꽂이: 국보159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뒤꽂이

일종의 머리 장신구이다. 무령왕릉 나무널(목관) 안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는 18.4㎝, 상단의 폭은 6.8㎝이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삼각형 모양이며,

밑은 세가닥의 핀 모양을 이루고 있어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삼각형의 윗부분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고,

3가닥으로 갈라진 꽂이 부분은 긴 꼬리처럼 되어 있어

마치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 날개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무늬를 빈틈없이 메꿔 놓았다.

새의 머리와 날개 부분의 테두리는 끌 끝으로 찍은 작은 점들이 열지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문양은 모두 뒤에서 두들겨 솟아 나오게 한

타출법(打出法)을 사용하였고 ,세부 표현에는

선으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3개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의례 때 쓰인 머리 장식품으로 보인다.

@무령왕비 금목걸이: 국보 제158호

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비의 목걸이로,

길이는 각각 14㎝, 16㎝이다.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는데,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활 모양으로 약간 휘어진 육각의 금막대를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고 다른 것과 연결시켰다.

고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을 짧은 목걸이의 경우 10∼11회,

긴 목걸이는 6∼8회 감아서 풀리지 않게 하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무령왕 금귀걸이 국보156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금 귀고리 한 쌍으로 길이는 8.3㎝이다.

왕의 널(관)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2가닥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 장식은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잎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었다.

옆으로 보면 안이 굽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둘렀다.

다른 한 가닥은 여러 개의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 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무령왕비 은팔찌 국보160호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팔찌의 외관을 깜싸고 있는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명문에 의하면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의 이름과 무게 등이 기록되어 가치가 높다. 

용의 조각이 웅건하면서 만든시기와 작가, 중량까지 기록된

삼국시대의 유일한 팔찌로서 고대 금속공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은제팔찌는 왕비의 왼쪽 팔목에 끼웠던 은으로 만든 팔찌로

팔목이 닿는 안쪽의 테두리 부위에는 수직의 짧은 선무늬를 가지런히 돌렸고

내면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라는 명문이 들어 있어서

이 팔찌가 다리라는 공인이 대부인,

즉 왕비를 위해 경자년(520)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비의 금귀걸이: 국보 제157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귀고리 2쌍으로

길이는 11.8㎝, 8.8㎝이다. 왕비의 귀고리로,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작은 장식들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으로

길고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 있고, 다른 한 쌍은 1줄로만 되어있다.

앞의 귀고리 중 긴 가닥은 금 철사를 꼬아서 만든 사슬에

둥근 장식을 많이 연결하였으며, 맨 밑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8개의 둥근 장식을 달고 그 아래 탄환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이나 탄환 장식은 달지 않고,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담록색의 둥근 옥을 달았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에 각1쌍씩 보관되어 있다.

 

@무령왕비의 두침(頭枕: 베게) 국보 제164호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왕비의 머리를 받치기 위한 장의용 나무 베개로,

위가 넓은 사다리꼴의 나무토막 가운데를 U자형으로 파내어

머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길이 40㎝, 높이 33.7㎝.

표면에는 붉은색 칠(朱述)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 무늬를 만든 다음,

그 무늬 내부마다 흑색·백색·적색 금선을 사용하여

비천상이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봉황,

어룡(魚龍), 연꽃, 덩굴무늬 등을 그려 넣었다.

베개의 양 옆 윗면에는 암수 한 쌍으로 만들어진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는데,

발굴 당시에는 두침 앞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부착하였다.

왕의 머리 받침은 거의 부식되어 두 토막만이 남아 있어

형체를 알 수 없든 것을 보수한 것이 전시되어 있다.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宋山里 方壇階段形 積石遺構)

 

송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적석유구이다.

제1단은 폭이 15m, 제2단은 11.4m, 제3단은 6.9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계단 모양을 하고 있다.

목관을 놓은 흔적은 없으며,

대신 그 자리에 10cm 두께로 붉은색의 점토를 깔았다.

내부에서는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와 옹관 편이 수습되었다.

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성 시대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가묘(假墓)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무덤이 아닌 제사시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송산리고분군 입구에 조성된 조형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