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불 제1370호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부도

2018. 7. 10. 21:45국내 명산과 사찰

보불 제1370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부도(槐山覺淵寺通一大師浮屠)

 

통일대사부도는 보개산 남쪽 기슭에 있다.

초행이라면 부도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이 분명하지 않아 길을 찾는데 혼동하기 쉽다.

필자도 이정표만 보고 길을 따라 직진하다가 칠보산 정상까지 간 오류를 범했다.

다행히 홀로 산행을 나온 한 분을 만나 그분이 일러 준 대로 다시 하산하여 겨우 찾아갔다.

각연사를 둘러보고 난 후 통일대사탑비를 지나 나타나는 이정표를 보고 4~5m 나아가면

다시 이정표가 보이는데 여기서 우측 능선을 타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인데

 초행이라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잘못 파악한 것이 실수였다.

우측 능선은 보개산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칠보산으로 향한다.

 

각연사를 기점으로 보면 사찰로부터 동남쪽 약 1km 지점에 통일대사탑비가 있고,

이로부터 동남쪽에 있는 보개산 주봉을 향해 약 3~40분 정도 올라가면 중봉의 능선에 이르고

그 능선에 통일대사부도가 건립되어 있다. 부도가 있는 곳까지 계속 가파른 능선이다.

칠보산 정상부근에서 만난 그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 부도가 있는 위치가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부도는 본래 무너져 있던 것이 1965년 발견되었고,

흩어진 부재를 모으고, 찾아내어 19826월에서 712일에 걸쳐

괴산군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도(浮屠)에 대한 유례를 간략히 살펴보면,

불문(佛門)에서는 승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사리(舍利), 즉 유골(遺骨)을 돌로 만든 묘탑(墓塔)에 안치하는데,

이를 사리탑, 부도(浮屠) 또는 승탑(僧塔)이라 부른다.

탑비는 이러한 부도와 함께 조성되는 것으로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일생의 행적을 적은 것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신라·고려 시대에는 역대 국왕이 고승(高僧)들을 존경하여

그들이 사망하면 장사를 후하게 치르고, 아울러 시호(諡號)와 탑명(塔名)을 내리면서

당시를 대표하는 문신과 명필에게 비문을 짓고 쓰게 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처럼 부도와 탑비를 함께 조성하는 사례는

 특히 신라 하대로부터 각 선문(禪門)을 새로 세우거나

그 계보를 이은 고승에 대한 숭앙심이 높아지면서 널리 유행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이러한 관례는 지속하였는데,

그 수량이나 제작 수준은 우리나라 석비의 역사에 있어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 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이전과 같이 국왕이 탑명을 내리는 국가적 차원의 조성은 매우 드물었지만,

부도와 탑비의 조성에 대한 전통은 꾸준히 지속하였다.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부도(槐山 覺淵寺 通一大師浮屠)은 고려 시대의 승탑이다.

20033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370호로 지정되었다.

각연사 통일대사부도는 각부의 조각 수법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무너져 있던 것을 복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를 구성하는 부재 또한 완전하다.

그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양식적으로 고려 전기 석탑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대사부도는 958-960(고려 광종 98-113) 사이에 건립되었고,

이 부도의 주인공이 통일대사임이 입증된 점으로 보아 탑비와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절대다수의 석탑은 사찰의 한쪽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고,

 탑비 역시 인근에 위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이 부도는 탑비와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건립되어 있어 위치상의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부도가 있는 곳에서는 사찰로 들어오는 진입로뿐만 아니라

각연사까지 조망되고 있어 다른 부도와는 확연히 다른 입지(立地)를 택하고 있다.

이같이 부도의 위치를 탑비와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건립한 예는

 쌍계사 부도, 보현사 낭원대사부도, 봉암사 정진대사부도 등 소수의 예에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변 및 사찰을 조망하기에 좋은 지점에 부도를 건립함은 9세기 이래 유행한

산천 비보 사상에 의해 산 정상부에 석탑을 건립하는 사상적 배경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배례석






<기단부>

부도는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갖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2.3m이다.

 기단부는 지대석·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체 부재는 완전하다.

지대석과 하대 하단석은 1석으로 조성되었다. 지대석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고,

하단석의 측면에는 좌·우각 4괄호형인 안상을 1구씩 배치했다.

하대 상단석과 중대석 받침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다.

상단석에는 복엽(複葉)16판의 복련(伏蓮)이 조식 되었는데,

8각의 각 면과 모서리에 각각 1구씩 배치하였다.

판단에는 귀꽃이 조식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파손되어 흔적만 남기고 있다.

상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 위에 굽형괴임대를 받침으로 삼아 중대석을 놓았다.

중대석은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모서리에 우주만을 모각하였다.

상대석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면에는 각형 3단의 받침을,

측면에는 단판 복엽 16판의 앙연을 배치했다.

연화문은 8면의 중앙과 모서리에 각각 8판씩 배치하여

하대 상단석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와 <상륜부>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1석으로 조성했다.

탑신석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模刻:보고 그대로 새김)했고,

·후면에는 이중의 선으로 장방형 액을 마련하고

내부에 문양을 새긴 문비형(門扉形:문짝모양)을 모각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각형 3단의 받침을 조출(造出)하고,

처마의 하면에는 각 모서리에 1판씩

나머지 면에 3판씩 모두 복엽 32판의 앙연을 조식(藻飾:아름답게 꾸밈)했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기왓골은 두툼하게 묘사되었다.

전각에는 귀꽃(석등이나 석탑 등의 귀 마루 끝에 새긴 꽃 모양의 장식)에 을 배치했는데,

현재 4개소는 결실되었고, 나머지 4면에는 접착제로 부착했다.










 




정상에는 단엽 16판의 연화문이 조식된 복련대(伏蓮帶)가 마련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어 노반(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의 일부)만 남아있는데,

옥개석과 1석으로 조성되었다.

측면에는 단엽 16판의 앙연이 입상형(立狀形)으로 조식 되었고

정상에는 찰주공(擦柱孔)이 남아있다.


















부도 하사길에서 잡아 본 각연사 전경


중앙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삼성각, 종각, 요사채를 두고 우측으로 비로전, 비로전 뒤에 요사채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