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조계총림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

2017. 7. 12. 22:02국내 명산과 사찰

대한불교 조계총림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제1부)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社)라고도 불리는 순천 송광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며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로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사는 1207년 최선(崔詵)이 작성한 대승선종조계산수선사중창기(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創記)에 의하면 

신라 말 혜린(慧璘)선사가 창건하고 처음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제자 수우(守愚)에게 중창불사를 명하였다.

송광사사원사적비松廣寺嗣院事蹟碑)에는 1197(명종 27) 공사를 시작하여

1205년에 공사가 끝났다는 기록이 있다. 공사가 끝나자 고려 희종은

산의 이름을 조계로 바꾸고 수선사(修禪社)란 이름을 내렸는데

나중에 송광사로 또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송광사는 강종(康宗)의 명을 받아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이 중창하고

조선 초기 고봉화상(高峯和尙)의 중창불사를 거쳐 대가람으로 성장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다행히 일부 건물만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42(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750칸만 남고

대웅전을 비롯한 2,152칸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1856(철종 7)까지 14년 동안 소실된 건물들을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여러 전각들이 또다시 소실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일제강점기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소실되기 전 송광사의 찬란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대웅전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 건물들은 1955년 이후 세워진 것들이다.

여러 차례 중창불사를 거치면서 배치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승보종찰송광사불일문(僧寶宗刹松廣寺佛日門)

송광사 들머리에 세워진 문이다. 일주문은 금당 입구에 따로 있다.

사찰의 경계를 표하는 일종의 한국식 패루(牌樓:패방)인가?

승보(僧寶)는 삼보 중 불법승(佛法僧)의 승()을 의미하고

종찰(宗刹)은 총림(叢林)을 의미하며 불일(佛日)은 보조국사 지늘을 의미한다.

 

지눌(知訥: 1158~1210)은 고려의 승려로, 속성이 정()이고, 자호가 목우자(牧牛子)이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이며, 동주(洞州: 서흥) 출생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도의(道義:. 821)국사를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여기며,

보조국사 지눌을 조계종의 중천조(中闡祖: 분명하게 밝힌 조사)로 여기며,

태고국사 보우(普愚: 1301~1382)를 중흥조(中興祖: 중흥시킨 조사)로 여긴다.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松廣寺) 셋을 일러 삼보사찰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쓰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오늘날 이 삼보사찰은 전통적인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禪院강원(講院),

그리고 율원(律院)의 세 기능을 다 집합시켜 놓았다는 뜻에서 각각 총림(叢林)이라고 불리고 있다.

삼보는 불교의 신행 귀의대상인 불((()을 가리키는 말로서

통도사가 불보사찰, 해인사는 법보사찰, 송광사는 승보사찰에 해당한다.

 

송광사는 1969년 조계총림(曺溪叢林)이 되었다.

조계총림을 발족하면서 초대 방장에 구산 큰스님을 추대하여

한국불교의 동량을 키우는 새로운 정혜결사와 수선(修禪)의 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16국사를 배출한 수행 정진의 도량으로서 승보종찰의 명성을 얻고 있다

편 편액은 <불광보조길상여의(佛光普照吉祥如意)>다.





매표소다. 송광사 경내는 여기서부터  1Km 정도 떨어져 있다. 매표소의 벽화가 눈에 들어와 담아 보았다.






<승보종찰조계산송광사>라는 표지석이 일주문 가는 길에 세워져 있다.




일주문으로 가는 길에 쭉쭉 뻗은 편백나무 숲이 장엄하다.  











@송광사 조계문(일주문)

일주문은 산문이라고 불리며 일반사찰에서는 천왕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세우지만

송광사는 조계문이라 부르며 특히하게 경내 입구에 세워져 있다.

파란 바탕에 금색으로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曹溪山 大乘禪宗 松廣寺)>라고 세로로 쓴 편액일 걸려있다.

이런 형식은 고려 때 주로 사용된 형식이며 조선시대에는 쓰지 않는 형식이다.

아래 편액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은 가로로 쓰여져 있다.



조계문은 신라말에 세운 것으로 1310, 1464, 1676, 1802년에 고쳐지었으며

현재의 양식으로 보면 1802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아담한 돌담 벽체 사이에 자리하며, 여러 층의 다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임경당>

'경치를 임한다'는 임경당(臨景堂)에 딸린 작은 정자는

육감정(六鑑亭)’삼청선각(三淸仙閣)’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반쪽이 계곡물에 두 기둥을 내리 뻗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고풍스런 목조건물과 계곡이 어울러져 송광사의 최고 포트존이 되기도 한다

 

육감정(六鑑亭)은 육근, 즉 몸()으로 보고() 듣고() 향을 느끼고(),

맛보고(), 의미()를 느낀다는 정자를 의미하며.

대웅전을 들어서는 시냇물에 못을 만들고 두개의 석주를 세워 누각을 만들었다.

이곳의 현판은 호남 제일(第一)의 대서예가로서 충청도의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 17861856),

평안도의 눌인 조광진(1772180)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꼽히는

전라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 영조461847 헌종13)1837(道光 17) 4월에 썼다.

조계총림의 초대 방장이었던 구산스님이 지었다는 주련에서 육감정(六鑑亭)의 의미가 잘 담겨져 있다.

 

曺溪山月照澹寒 (조계산월조담한)

滿月乾坤無寸草 (만월건곤무촌초)

聖賢尊貴非我親 (성현존귀비아친)

大地眞金未是診 (대지진금미시진)


조계산에 뜬 달 사무치게 비치고

달빛은 온 천지에 가득하니 번뇌 망상 사라지네

성현이니 존귀(尊貴) 따위 나와는 무관한 일

대지(大地)가 진금(眞金)일지라도 이 깨달음만 못한 것을 ..




<삼청교와 우화각>

홍교(아치형) 위의 전각이 우화각이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홍교는

1700년에서 1711년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며, 일명 삼청교, 능허교라고도 불린다.

다리 위에 우화각이라는 건물을 세워 건물 구실도 하는 특이한 다리이다.

송광사성공중창록(松廣寺成功重刱錄)에 의하면,

이 홍교는 1700(숙종 26)에서 1711년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며,

그 뒤 60여 년이 지난 1774(영조 50)에 중수하였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19개의 4각장대석을 각지게 맞춰 홍예(虹蜺)모양을 이루고

양쪽 측면으로는 막돌이 아닌 4각판석을 쌓아올렸다.

, 난간 받침돌과 돌출된 중심돌 위에 4개의 긴 돌을 연결하여 난간을 이루었고,

홍예 천장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다.

 

이 홍교(虹橋)는 선암사의 승선교, 흥국사의 홍교와 같이 웅장한 멋은 없으나

다리 구실도 하고 또 이 다리 위에 '깃털과 같이 몸이 가벼워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우화각(羽化閣)이라는 건물을 세워 사람의 통행을 돕는 이중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우화각을 지나면  종고루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삼청교 위에 세워진 우화각은 숙종 때 지어졌으며

영조 때 중수 되었으며 우화각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지만 천왕문 쪽은 맞배지붕이라고 한다.


(사천왕 좌는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우측은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송광사의 소조사천왕과 사천왕상과 복장유물들이 보물제 1467, 보물제 1468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사천왕상은 조형성이 뛰어나고 복장전적은 조선 세조간경도감에서 복각한 것으로

이름만 전해지고 있던 경전이 실물로 발견되어 그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4구의 사천왕상으로, 2004년 복장(腹藏) 조사에서 각종 전적류와

 인본다라니 등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들고 있는

비파의 뒷면에 쓰여진 명문과 복장유물 등의 분석을 통해

1628(인조 6)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6428일 보물 제1467호로 지정되어, 송광사 천왕문(天王門)에 봉안되어 있다.

 

(좌측은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우측은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불상의 전체 앉은 높이는 403이다.

우리나라의 사천왕상은 불·보살상의 존상과 달리 주로 대형의 소조(塑造)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한 제작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화려한 채색까지 가하고 있어 복합적인 조각 분야로서 주목되고 있다.

이 네 천왕은 모두 의자에 앉아 양 발로 악귀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종고루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네 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다.


천왕문에서 바라 본 대웅전이다.

송광사의 천왕문·해탈문(解脫門대장전(大藏殿종고루(鐘鼓樓법왕문 등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천왕문은 1609(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숙종 44)에 중수하였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100여년이 지난 1806(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 건물의 크기는 4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대웅전

@송광사의 중심 건물인 지금의 대웅보전은 1951년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고  1988년에 송광사 8차 중창 시 다시 지어진 것이다.

1961년 중창 때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1()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삼세(과거 현재 미래)제도를 염원하는 삼세불 즉,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셨으며,

각 부처님의 좌우에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등 4대 보살을 모셨다.

108평 규모의 대웅보전은 독특한 건축형태와 단청으로 현대 한국 전통건축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좌로부터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이다.


석가모니불 옆에 협시불로 문수와 보현보살을 모셨다.


연등불과 지장보살


미륵불 좌우에 문수보살과 관음보살









@지장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8. 불상의 높이는 석가여래(본존) 172, 무독귀왕() 194, 도명존자() 181.

송광사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권속 일괄 내부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어

1640(인조 18)이라는 제작 시기가 밝혀졌다.

목조로 제작된 지장보살상을 제외한 나머지 존상들은 모두 소조로 조성된 것이 조사에서 밝혀졌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의 좌우로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한다.

무독귀왕은 정면에 보상화문이 있는 원류관 형태의 관모를 쓰고 있으며  

턱이 긴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무독귀왕은 양손을 비단으로 감싼 채 보함을 들고 있다.

무독귀왕의 가늘게 뜬 눈과 전반적인 이목구비와

전신을 덮는 단령포, 의대, 수직으로 흘러내린 광다회와 세조대를 걸친 모습은 시왕상들과 큰 차이가 없다.





젊은 비구 형상의 도명존자는 장삼과 법의를 걸치며 양손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며

전반적인 이목구비는 지장보살좌상 보다 좀 더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송광사의 전각들>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대사찰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순천 송광사의 전각들은 승보사찰답게 금당(金堂)과 수행도량은 많지만

어느 전각을 둘러보아도 한 기의 석탑(石塔)이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대웅전 앞 마당의 배롱나무, 꽃이 피는 계절에 왔다면 대웅전과 어울려 멋진 풍경일텐데..





영산전

순천 송광사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怜僧)은 의겸(義謙)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정조 17(1793)에 중창되었으며

내부 모셔진 불화는 보물 제 13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2칸 규모로 단층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려고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부의 공포(栱包)는 이출목(二出目)이나 처마 밑의 공포는

삼출목(三出目)으로 짜올려 건물의 외관을 장중하게 꾸몄다.

내부는 대들보를 받는 공포의 살미 끝은 양봉(樑奉) 형태처럼 확대하여 천장의 공간을 넓혔으며,

네 모퉁이의 귀살미와 그 좌우의 살미 끝이 길게 뻗어나와 서로 교차시켜 연결한 묘한 부재(部材)를 사용하였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그 중앙 후면에 불단(佛壇)을 놓았으며

그 위의 닫집은 보개(寶蓋) 형식으로 되어 있다.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 조각이 힘차고 간결하여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나타낸다

 정면에는 3칸 모두 2짝띠살분합문을 달았고 향 좌측면 앞칸에는 외짝띠살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내부에는 뒷벽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금분을 입힌 목조여래좌상(1780년작)을 봉안하였다.

불상 뒤에는 영산회상도(1725년작)를 공포 맨 위 대들보 바로 아래에 후불탱으로 걸어 놓았다.

후불탱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일반적으로 석가후불화에서 보이는 불·보살과 제자 등의 교화성중 및

사천왕·팔부중 등 호법신들에 추가하여, 국왕과 대신같은 많은 청문성중을 비롯한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사리불(舍利佛)까지 등장시켜 놓았다.

그 위에 운궁형(雲宮形) 천개를 설치하고 그 안쪽 천정에 황룡그림을 금분을 입혀

중앙 불단에 모셔진 이 상은 복장(腹藏) 조사를 통하여 1780(정조 4)에 조성되었음이 알려졌다.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매우 낮아 구분이 어려우며 정상 계주(頂上髻珠)와 중 계주(中髻珠)를 지니고 있다.

얼굴은 조선 후기의 불상처럼 네모나면서도 넓적하다.

그러나 턱 선을 굴려서 둥근 느낌을 준다. 이목구비는 크고 뚜렷하다.

반달형의 눈썹, 길고도 크게 뜬 눈, 오려붙인 듯한 코,

도톰한 느낌의 미소를 띤 입술 등이 표현되어 표정이 온화하다.

미간에는 백호(白毫)가 있으며 양 귀는 턱 선 부분까지 내려왔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불의(佛衣)는 왼쪽 어깨를 중심으로 내려져 팔까지 덮고 있다.

왼쪽 목깃 부분에서 한 번 반전한 자락이 등 뒤를 돌아 오른쪽 어깨를 감싼다.

그리고 팔목 부분을 내놓은 채 오른팔 뒤로 돌아가고 있다.

가슴에는 승각기가 보이지만 매듭 표현은 없다.


 

불의는 다시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왼쪽 다리 위에 얹은 오른발만 내놓고

양 무릎을 감싸고 있는데 형식적인 주름이 표현되었다.

무릎 위에서 왼손은 촉지인(觸地印)을 취하고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이 끝을 맞댄 아미타인(阿彌陀印)을 하고 있다.




약사전 

민간신앙에 따르면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ṣajyaguru))는 어떤 병은 그의 상을 만지거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기만 해도 효과적으로 치료된다고 한다.

경전에 약사여래는 동방정유리세계의 교주로 병든 자를 구원하는 의왕으로 불리며

약사유리광여래·의왕여래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의 48 서원과 함께 약사여래의 12대 서원이 유명하다.

약사여래는 구원불의 하나인 아축불(阿閦佛 Akṣobhya)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일본의 몇몇 종파에서는 그를 또 다른 구원불인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약사여래 신앙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찍이 통일신라 초기부터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성행해

탑의 기단이나 1층 탑신에 약사여래의 권속을 조각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거듭되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기원법회가 자주 열렸다.

오늘날에도 약사여래는 한국에서 석가모니불·아미타불·미륵불과 함께 가장 널리 신봉되는 부처의 하나이다.


 

@송광사 약사전은 보물 제 302호로 1974년 중수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인조 9(1631)에 중건되었으나 5년 뒤 병자호란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영조 27(1751)에 중창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대들보가 없이 공포만으로 가구를 받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다.




@내부에는 뒷벽에 약사후불탱화(1904년작)가 걸려 있고,

그 앞 불단에 약사불조상(1746년 개금)이 봉안되어 있다.

천정은 공간포와 귀포가 모두 한 가운데로 집중되어 올라가면서 가득 메우고 있어 짜임새가 돋보이나,

순각판과 천정반자에는 흰 바탕에 도식화된 구름무늬만이 그려져 있어 짜임새 있는 구조와 어울리지 않는다.

1974년에 중수 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36년에 중건되고,

6년후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는데, 그 뒤 1751년에 중창되었다.




~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