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개화산 약사사
2020. 8. 22. 00:37ㆍ카테고리 없음
코로나 여파로 멀리 가지는 못하고 장마가 끝나는 날
가벼운 나들이로 개화산에 있는 약사사와 미타사를 찾았다.
장마는 끝났지만 날은 흐리고 도로는 예상한 대로 정체가 심했다.
약사사는 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사암이다.
개화산 약사사(藥師寺)는 조선 후기의 화가로 이름 높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개화사(開花寺)란 제목으로
개화산과 절 그리고 주변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바로 이 개화사가 지금의 약사사이다.
절의 창건은 삼한 시대 혹은 신라 시대로 전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창건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고려 시대의 유물인 석불과 삼층석탑이 남아있는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짐작해볼 따름이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는 별다른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가
1737년(영조 13)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 의해 크게 중수된 후
송씨 가문의 원찰이 되었다. 송인명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어려서 몹시 가난했는데 개화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1736년에 좌의정에 오르자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절을 크게 고쳐 지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 때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병연(李秉淵)이 송인명에게 보낸 시를 통해 더욱 잘 알 수 있다.
봄이 오면 행연(杏淵) 배에 오르지 마오
손님이 오면 어찌 꼭 소악루(小嶽樓)만 오르려 하나
책을 서너 번 다 읽은 곳이 있다면
개화사(開花寺)에서 등유(燈油)를 써야지.
『사천시초(槎川詩抄)』
정선이 그린 《개화사》, 한강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조선 후기 문인 이병연(李秉淵)의 「분매」·「정양사잡영」·「오대산」·
「만폭동」 등을 수록한 시집인 『사천시초(槎川詩抄)』 보고
이병연과 교류하고 있던 겸재 정선이 이 시를 보고 그렸다고 한다.
겸재(謙齋)는 정선(鄭敾)의 호다.
1676년(숙종2년)년~1759년(영조35년) 활동한 조선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 본관은 광산,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 또는 겸재(謙齋)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3대에 걸쳐 관직에 오르지 못해 몹시 가난했다.
생계를 위해 이웃 김창집의 추천을 받아 도화서에서 관직을 얻었으며
만년에는 종2품 벼슬에까지 몰랐다.
말년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여 조선 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진경산수화에서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함으로써 한국적 회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약사사삼층석탑(藥師寺三層石塔)
공식명칭: 서울 약사사 삼층석탑
조성 : 조선전기
문화재 지정: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39호
크기: 높이 4m
고려 후기 화강암으로 조성한 3층 석탑으로
1980년 6월 11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부터 약사사의 뜰 가운데 있던 정중탑(庭中塔)이다.
현재는 약사사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다.
약사사 삼층석탑은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기존의 모습을 형식적으로만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석탑은 불교미술이 다소 퇴화해 가던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약사사 삼층석탑은 비록 전체적인 양식이 훌륭한 편은 못되지만,
고려 중기 이후 탑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 작품이기에 그 가치가 있다.
삼층석탑은 높이는 약 4m 정도이고
단층의 기단 위에 삼 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전부 소실된 상태이다.
기단석은 한 장의 널찍한 판돌인데 지대석 위에 면마다 한 장씩 놓여 있다.
기단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두 생략되어 있고
아무런 장식도 찾아볼 수 없어 그냥 큰 돌을 갖다 놓은 듯하다.
기단의 상층 갑석도 한 장의 돌로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고,
중앙에 옥신 받침이 있기는 하나 매우 간략화된 형태이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다른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신 양쪽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초층의 탑신이 2층과 3층의 탑신보다 높지만,
2층과 3층은 별다른 체감을 보이지 않다.
옥개석은 두껍고 옥신에 비교해 넓은 편이다.
옥게 받침은 5단으로 형식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게 흐르고 있다.
추녀 밑은 수평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고,
낙수면 끝의 반전은 거의 일어나고 있지 않다.
옥개석만을 두고 본다면 매우 무거운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비교적 탑의 높이가 높고 길쭉한 형태를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는 그 느낌이 반감된다.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소실되어 그 이상의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이다.
@대웅전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븡으로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중앙에,
좌우 협시불로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본존불 뒤에는 석조약사불입상을,
아미타불과 약사불 사이에는 보현보살, 지장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을 봉안했다.
서울 약사사 석불입상
시대: 조선전기
문화재 지정: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40호
크기: 높이 3.3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 높이 3.3m. 이 석불은
약사전 옆에 있던 목조건물 내부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74년 건물의 철거와 함께 노출되었고
그 자리도 원위치에서 앞쪽으로 약 3m가량 옮겨졌다가
약사사 증축 때 대웅전에 봉안되었다.
갓 밑에 남아있는 글에 의해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 위에는 챙이 넓고 중심부가 반형으로 약간 솟은 돌갓을 쓰고 있으며
머리와 신체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길쭉한 얼굴에 이마가 넓고 코와 턱과 두 뺨에
살집이 있으며 입가에는 미소가 흐른다.
그러나 얼굴이 양어깨 사이에 묻히면서 목의 표현은 생략되었고
각이 진 어깨에 두툼한 법의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가슴에 모은 두 손은 몸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자그맣게 조각되었다.
두 손으로 연꽃 가지를 받쳐 들었으며
하체는 너덧 줄의 비낀 평행 곡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이 석불에서 느끼는 첫인상은 길쭉한 얼굴이
가슴에 붙어 목의 표현이 생략되고
어깨 이하로 몸 전체가 사각의 돌기둥에 상징적인 윤곽만이 표현되어 있어
매우 추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표현 감각은 매우 간결하고 부드럽다.
또한, 추상적이지만 균형에 어긋난 과장이 없고
오히려 담백하고 천진한 느낌을 준다.
이 석불상은 마치 조선 시대 능묘의 문인석이나 무인석에서 볼 수 있는
석물 조각의 양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석불 양식의 뿌리는 속칭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양식이 민예적으로 흘러 더욱 추상화되면서
결국은 능묘의 인체 조각 양식과 유사한 석불이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서울 지역에는 석조 약사불이 많이 보이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락산 흥국사의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정릉 봉국사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인데
약사사의 석조약사여래좌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다.
위의 두 약사불은 온화한 인상을 풍기는 데 반하여
약사사의 약사불은 석장승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