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모악산 금산사(3/3)

2017. 7. 21. 20:35국내 명산과 사찰

김제 모악산 금산사(3/3)

1635년 편찬된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정유재란 이전 소실되기 전

금산사의 경내는 크게 대사구·봉천원구·광교원구 등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80여 채가 넘는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4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후 경내의 건물 가운데 수문대사에 의해 재건된 건물은

3구역 중 대사구의 일부만 건립되었으며

나머지는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대적광전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원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불과,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

즉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함으로써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이 금산사 대적광전(金山寺大寂光殿)에도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아마타여래와 석가모니불을, 우측에 노사나불과 약사여래를 모셨다.

편액은 전북고창 출신 대 서예가 석전(石田) 황욱(黃旭)선생의 작품이라고 한다.

 


1597(선조 31) 정유재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대웅대광명전이라 하였다가

1635(인조 13) 재건된 후부터 대적광전이라 칭하였다.

1776(영조 52)에 중수하였으며, 1926년에 보수를 하였다.

1963121일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86126일 화재로 전소되어 보물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1990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좌로부터 대세지보살/아미타/관음/석가/보현)


금산사 대적광전은 금산사의 중심이 되는 불전이며

사찰 내의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정면 7, 측면 4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이다.

축대 중간에 석계가 있고, 한층 높은 기단 위에 원주를 세웠는데,

정면 7칸에는 쌍합의 10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좌로부터 석가모니/보현보살/비로자나불/문수보살/노사나불)

 

그러나 출입하는 중앙칸 이외는 모두 하부에 머름을 대어 문 높이를 줄이고 있다.

측면은 4칸으로, 4칸 중 제1칸은 외짝 출입문을 달고,

나머지는 회벽을 치고 상부에 인방(引枋)을 가로질렀다.

주춧돌과 기둥은 각각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과 목재를 사용하였다.

공포는 다포식에 내외 2출목이다. 공간포는 한 개씩이나 중앙칸은 2개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각 문의 문살은 빗살문이다.



(좌로부터 비로자나불/문수보살/노사나불/월광보살/약사여래)

 

법당에는 마루를 깔고, 측면 제3기둥에 연하여 길쭉한 불단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약사전 등이 불타자

수문대사가 1635(인조 13) 이들을 합쳐서 28칸의 대적광전을 세워

5여래 6보살을 안치하였다. 법당 내부에 2단으로 불단을 쌓고,

그 상단에 5구의 소조여래좌상과 6구의 소조보살입상을 봉안하였다.


(좌로부터 노사나불/월광보살/약사여래/일광보살)

 

불단 서편으로부터 아미타여래·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약사여래의 순으로 좌상을 배열하고,

보처불로는 아미타여래 좌우에 관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셨으며,

비로자나불 좌우에는 문수보살·보현보살을 모셨고,

약사여래 좌우에는 일광보살·월광보살을 모셔 6구의 입상을 배치하였다.

이들 불상 앞에는 각기 다른 형상의 조그마한 목조나한상이 4~5줄로 늘어서 있는데

그 수는 500구에 달한다.

본래 비로자나불과 석가여래의 천장에는 용을 조각한 닫집을 매달았으나,

지금은 석가여래의 정상에만 닫집이 남아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과 거칠게 다듬은 목재를 사용하고

좌우 측면에는 각각 3개씩의 충량(衝樑)을 걸었다.

천장은 대들보 바로 위에는 우물천장을 했으며, 불단 위쪽은 한층 높게 가설하였다.


(월광보살/약사여래/일광보살) 


금산사 대적광전은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귀중한 문화재였다.

비록 현재의 건축이 문화재는 아니지만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약사전 등의 통합 전각으로

 그 규모와 불상의 배치 등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문수보살/노사나불/월광보살)


(보현보살/비로자나불/문수보살)


(관음보살/석가모니불/보현보살)

(대세지보살/아미타불/관음보살)







석련대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육각다층석탑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명부전

@명부전은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철종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다.

대장전 오른쪽에 있는 명부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잘 다듬은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기둥을 올린 후 기둥마다에다 공포를 올려놓은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연혁은 1857(哲宗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할뿐

그 이전의 일은 알지 못한다. 다만 1598(선조 31) 정유재란의 화를 입어 절이

소실되기 직전의 기록에 시왕전 9칸이라는 기록이 보이므로

지금의 명부전은 조선중기의 시왕전이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라 생각된다.

안에는 지장삼존 곧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무독귀왕도명존자를 봉안했는데

 지장보살은 왼손에 금강보륜을 쥐고 있다.

상호는 비교적 각진 모습에 도식화된 느낌이 들어

아마도 명부전의 중수가 이루어지던 1857년 무렵에 조성된듯하다.

금강보륜(金剛寶輪) . 금강저(金剛料) . 물병을 써서 기도하고 소원을 성취기도 법이다.



<명부전 시왕도>

화기(畵記)에 의하면,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풍곡당(豊谷堂) 덕린(德麟), 해운당(海雲堂) 익찬(益贊), 월허당(月虛堂) 준언(俊彦),

반월당(槃月堂) 해선(海詵) 등의 승려들이 편수가 되어

1861(철종 12)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에 있는 도갑사(道岬寺)에서

20명의 화원과 함께 그린 다음 이곳 금산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명부전(冥府殿)의 지장삼존상 뒤에 봉안되어 있는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 판관, 옥졸 등이 둘러싸고 있는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시왕도는 사찰 내 명부전, 지장전(地藏殿), 시왕전(十王殿) 등에 봉안되는 불화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그 하단부에 시왕·제석천·범천·사천왕 등이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주류를 이루었던 반면,

조선시대에는 본존인 지장보살의 좌우를 둘러싼 형태로 구도상의 변화는 있지만

고려시대의 도상적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장시왕도 제작이 매우 성행했다.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시왕도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구성된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는

진표율사(眞表律師) 이래 번성한 지장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불화이다.

일찍이 진표율사는 철저한 수행의 힘으로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고 더욱 정진하여

미륵에게서 다시 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진표율사의 수행에서 지장신앙은 미륵신앙과 함께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금산사 명부전 시왕도에는 진표율사의 투철한 정진의 힘이 시대를 초월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장전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석등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고찰답게 해묵은 고목들이 많이 보인다.




당간지주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이제 경내를 다 돌아보고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 뒤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