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다

나그네 현림 2006. 10. 22. 10:25

 

<불암산에서 바라 본 도봉산>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다


이해와 배움에는 참으로 한계가 없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고 살고 있는 이 자연이 바로 지식의 책이 됩니다.


그럼으로 배운다는 마음만 절실하다면,

책 없이도 얼마든지 구하는 바를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낯선 지방을 여행할 때 지도가 필요합니다.

외국여행이라면 길을 잘 아는 가이드도 필요합니다.

의미 있는 참된 삶의 길을 가는 데는 선지식이 필요합니다.


좋은 인연을 쌓으면 좋은 선지식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선지식의 소리를 듣도록 하십시오.

듣는 재산이 모든 부(富) 중에 으뜸입니다.

언제나 들으십시오. 사람은 듣게 되어 있습니다.

입은 하나지만 귀는 둘이니 그게 바로 증거입니다.

말은 적게 하고 듣는 것은 많이 들으십시오.


만약 사람들이 말을 듣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으로 족하다면

하나의 귀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것도 얼굴 정면쯤이 좋겠지요.

그러나 귀는 머리의 양측에 붙어 있으니

말이 들리면 두 쪽으로 나뉘어

각각 한 쪽 귀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메시지를 분석하여 이해한 다음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입으로 진리라고 외치는 소리,

어느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전승(傳承)되어진 말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받아 드리지는 마십시오.

귀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가 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에는 또 닫을 문도 없습니다.

들어오는 모든 파동을 잡아채는 깔대기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려면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면 치열과 입술을 지나와야 합니다.

말을 신성시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이 쉽사리 튀어나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래도 말을 하고 싶으면 두 번 생각토록 하십시오.

침묵을 능가할 때만이 말이 진가를 발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이해는

감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귀로 들으면서 마음도 함께 해야 합니다.


듣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취(聽取)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청(傾聽)하는 것입니다.

청취하는 것(hearing)과

경청하는 것(listening)은 크게 다른 것입니다.

청취하는 것은 그저 소리로 듣는 것입니다.

경청하는 것은 마음이 소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만약 경청하고 있다면 노트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수천수만 기가의 용량을 갖춘

컴퓨터의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주의 깊게 들으면 왜곡됨이 없이,

누락됨이 없이 녹음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매우 단순해 보일지 모르나

전체 인생을 형성하는 벽돌들입니다.

이런 벽돌이 없으면 영적분야에서는

아무 집도 지울 수 없고 성취하지도 못합니다.


귀는 둘인데 입이 하나인 것은 침묵을 의미합니다.

들은 것을 전부 입으로 토해내지 말라는

그런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 침묵이 이해력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침묵이 있어야 그것을 통해서

내면에 있는 조용한 주시자(注視者)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침묵이 영혼이며 자각입니다.


자각은 조용합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거기서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저 바라봅니다.

주시자는 결코 사건에 개입해서 한쪽 편을 들지 않습니다.

태양은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바람도 하늘도 물도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주시자가 그기에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신은 행동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깨어있고 침묵하는 그 주시자를 즉 아는 자를 알려면

다른 것들을 먼저 알려는 태도를 멈춰야 합니다.

다른 것은 나중에 알도록 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저절로 다가옵니다.

 

만약 아는 자를 모르면 온 세상을 다 가져도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닌 모든 부(富)는 커다란 제로(0)에 불과합니다.

제로는 그 자체로서는 가치가 없습니다.


수표에다 0을 몇 개 써서 다른 사람에게 줘 보십시오.

그렇게 해 바야 한 푼 어치 가치도 없습니다.

0을 두 개 더 붙여봅니다. 아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앞에 1을 하나 놓고 0을 추가하기 시작하면

0하나마다 열 배로 가치가 늘어납니다.


제로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 박사야,” “난 교수야” “난 성직자야”

“난 이런 사람이야” “난 저런 사람이야”

“이런” “저런” 것은 모두 제로입니다.

“난 큰 0이다” “난 작은 0이다”

<0>이란 숫자란 크게 써든 작게 써든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아십시오.

그러고 나면 다른 지식은 증폭효과를 지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제로 앞에 있는 하나(1)를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은 바로 그 앞의 <1>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조용히 그러한 내적인 지식을 스스로 찾으십시오.

고요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깨닫고 싶으면 침묵 속으로 고요 속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지혜의 유일한 한계는 침묵입니다. 말이 아닙니다.

그 침묵 속에서 여러분들의 참된 본성을 깨달으십시오.

그것은 묘사할 말이 없습니다.

경전에 이르듯 그것은 의식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의식의 총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수 없습니다.

표지도 상징도 없습니다.

그것은 한 곳에 위치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귀는 둘인데 입이 하나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