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 만행 한시 화두

저 산이 네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나그네 현림 2025. 6. 3. 22:28

어느 절에서 스승과 제자가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앞에 보이는 저 산이 네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한참 침묵하더니 한 제자가 말했다.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저 큰 산을 마음에 담고 다니려니 힘들겠구나.”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뻔한 답을

스승은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스승이 한 질문의 요지(要旨)는

단지 산이 내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의 요지는 마음이 본다는 그 대상이 무엇이며,

본다는 그 마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은 본다는 것은 마음이 본다는 것인데

그 마음은 무엇을 보는 것인가?

<수능엄경>에서는 우리가 보는 그 대상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마음이란 진짜 마음이 아니고

육진(六塵)의 분별영사(分別影事)이다.

분별영사는 육진 경계의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 따위를 대하여 생각을 일으켜서

인식하는 마음이니 사물의 실상인 속 알맹이가 아니고

사물의 거죽인 그림자를 따라서 분별하는 것이다.」

쉽게 풀이하면 우리 마음이 분별하는 모든 대상은

육진(六塵)이 일으킨 분별 망상이라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영화나 TV에 나타난 영상을 마치 실제인 양 보듯

육경(六境)과 육근(六根)의 인연 화합으로

우리 마음이 지어낸 영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육진(六塵)이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을 의미하고

진(塵)이라고 말한 것은 육경에 안(眼) 등의 육근(六根)이 들어와서

정심(淨心)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진(塵)이라 한 것이다.

이를 《원각경(圓覺經)》에서는

「사대(四大)를 이 몸이라고 허망하게 알고(自身相),

육진(六塵)이 인연 화합으로 나타난 것을

내 마음이 상이라 여긴다(自心相)」라고 한 것이다.

보는 <나>라는 주체가 사대가 화합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인데 이를 <나>로 알고

눈앞에 나타난 대상을 실제인 양 분별하는 것은

마치 눈병 때문에 보이는

허공의 꽃(空華)을 보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눈병이라 말한 것은 깨끗한 마음(淨心)이 오염되었다는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정심(淨心)이란 분별을 짓지 않은 마음이기에

일심(一心)일 뿐인데 허망한 분별 망상심이 일어나

2가지 3가지 마음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 망상을 일으키는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은 무명(無明)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종경록(宗鏡錄)>에 이르기를

「목전의 경계를 분별하는 一念無明妄念(=生相)이 나오는 것을,

마치 석녀(石女)가 어린아이를 임신한 것처럼 관찰하라.

즉 그것은 허구적인 명칭일 뿐

실재가 없음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무명 망념이 목전의 경계상을

실재하는 사물인 양 잘못 분별하고

굳게 집착하는 모습(住相)을 반짝이는 햇빛이

물결의 인연을 따라 허상으로 뒤집히는 것처럼 관찰하라.

무명 망념이 목전의 경계(我所)와

인식의 주체인 아(我)는 따로 실재하여,

그것이 다른 모습(異相)이라고 분별하는 것을,

실재하지 않은 뜬구름이

모든 환상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관찰하라.

일념 망념의 분별을 따라 마지막으로 일으키는

身, 口, 意의 3가지 행위(身口意 三業)가

의식 속에서 사라지는 분별(死相=滅相)을 관찰하기를

눈병 때문에 나타난 헛꽃(狂花)이

허공에서 교대로 뒤바뀌는 것처럼 관찰하라.

이처럼 生住異滅로 起滅하는 一心四相은

실재하지 않은 허상이라고 관찰하며,

그것이 無明生相이 없는

무생의 이치(無生) 임을 심오하게 통달한다면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주재함이 없이(無我),

부질없이 나왔다가 부질없이 사라지며, 허깨비처럼 떨어지고

허깨비처럼 오른다는 것은 알게 된다.」라고 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산이 내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라는

질문의 숨은 의도는 눈병이 나으면 공화(空華)가 사라지듯

모든 대상은 일심(一心)이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습인데,

중생들은 일심 자체가 공적(空寂)하다는 것을 모르고

분별하는 망념에서 현실에서 일어나고

보이는 것을 실재인 양 취하기 때문에

이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느냐 하는 질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대상을 인식함에

차별적으로 구별되는 모습이 있는 듯 하나

그 자성이 공적하다는 것을 안다면

목전의 경계와의 접촉에서 유무(有無),

내외(內外), 고락(苦樂) 등등을

실재인 양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전의 경계는 분별하는 망념을 따라서

허상으로 나왔으나 그 자체인 분별하는 망념이 공적하다면

그에 따라 나타나는 경계의 허상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실재하는 목전의 경계가 없다면

차별적인 경계를 따라 집착하면서 속박받는 마음이

스스로 제거되어 인식의 주체인 분별 망념과

인식의 대상인 목전의 세계(能所)가 함께 공적해진다.

그런데 누가 주관*객관이 끊긴 평등성에서

목전의 경계를 실재인 양 여기고

그것에 집착하고 애착하는 마음을 내겠는가.

상대적인 모습으로 취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목전의 내외(內外)나, 경계의 여부(有無)에 따라서

생멸을 반복하는 망념의 속박은 저절로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이 네 마음에 있다, 밖에 있다는 것은

<나>라는 실체와 <대상> 즉 보이는 객체가 실체가 없는

공적(空寂)한 것임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선가(禪家)에서는 부모(父母) 미생전(未生前)의 본래 마음은

청정하다고 하나 현실에서 중생의 마음은

태생부터 전도(轉倒)되어 있는 것이다.

수태(受胎) 상을 보면 머리가 밑으로 향해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올 때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태어나기 전 중생의 본래 마음은 청정하다고 하나

현실에서의 중생은

수태부터 전도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환자가 오면 의사가 검진(檢診)하듯

스승이 제자들에게 한 뻔한 이 질문은

제자들이 수행한 경지가 얼마만큼 익었는지

법거량을 해본 말인 것이다.

 

꿈속에서는 동서남북이 있지만

깨고 나면 동서남북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