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 만행 한시 화두
아뢰야식과 선시(禪詩)에 대한 소고(小考)
나그네 현림
2025. 5. 28. 11:36
깨달음을 향한 방편으로 선방(禪房)에서는
간화선(看話禪)을 많이 합니다.
간화선(看話禪)에서 화두(話頭)는 필수입니다.
화두란 실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언어적 해설은 불가합니다.
그래서 옛선사들은 이를 선시(禪詩)로 송(頌)하는 데
그 선시(禪詩) 또한 화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중국 남송 시대
고봉원묘(高峰原妙:1238~1295)라는 선사가 있습니다.
그가 지은 이런 선시(禪詩)가 있습니다.
海底泥牛含月走(해저니우함월주)
巖前石虎抱兒眠(암전석호포아면)
鐵蛇鑽入金剛眼(철사찬입금강안)
崑崙騎象鷺鶴牽(곤륜기상노학견)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이러합니다.
바다 밑의 진흙 소는 달을 품고 달아나고
바위 앞의 돌 호랑이는 새끼를 안고 졸고 있다.
쇠 뱀은 금강안을 뚫고 들어가는데
곤륜산은 코끼리를 타고 해오라기와 학이 끌고 있구나.
어법(語法)상으로는 하자가 없지만
내용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진흙은 물에 들어가면 녹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진흙으로 빚은 소가
바다 밑에서 밭을 갈고 가고,
달을 품고 달아난다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그뿐만 아니라 돌 호랑이(石虎)이나, 쇠뱀(鐵蛇)도 그렇고
곤륜산이 코끼리를 타고 해오라기와 학이 끈다는 말을
어떻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무명(無明)과 깨달음(覺)에 대한 것을
알음알이로 이해한다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 같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화두와 선시란 언어 밖의 언어입니다.
상식을 초월한 언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철학적인 사고나 논리로서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알음알이로 해석한다면 앞의 2구는 무명 중생을 질타한 소리이고
뒤의 2구는 아집(我執)에 헤어나지 못함과
깨달음에 이른 공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방: “진흙 소가 바다 밑을 간다.” 참조)
때로는 드러난 글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숨은 뜻은 드러난 글 밖에 있기도 합니다.
선가에서 회자하는 양귀비의 소염시(小艶詩)를 봅시다.
一段風光畵不成 (일단풍광화불성)
洞房審處設愁情 (동방심처설수정)
頻呼小玉元無事 (빈호소옥원무사)
只要檀郞認得聲 (지요단랑인득성)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싶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
자주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이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양귀비와 안녹산의 밀회는 익히 야사(野史) 등에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양귀비가 안녹산이 입궐할 때는
그를 찾는 소리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 소염시가 선가에서 이용되는 것은 전혀 다른 뜻이 있습니다.
화두와 선시가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유무(有無)와 자타(自他), 진위(眞僞)를 벗어난 경지를
<나>의 심의식(心意識)에 따른
사량심(思量心: 분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이해를 돕기 위한 많은 충언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나름대로 추려봅니다.
① 有와 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② 眞僞로 알음알이를 짓지도 말고
③ 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며
④ 意根下를 향해서 사량하고 계교하지도 말며
⑤ 語路上에서 活計를 짓지도 말며
*活計: 여기서는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을
언어적의 길로 모색하는 것.
⓺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며
⓻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려고 하지 마라.
우리의 인식 작용을 유식에서는 팔식(八識)으로 구별합니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는 오감(五感)에
의(意)가 더한 것으로 이는 우리가 말하는 마음
이라는 것입니다. 제7식은 말나식이라 하여 아집(我執)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본식이 바로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육식(六識)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 하고,
제7식과 8식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여
이를 삼세육추(三細六麤)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가장 깊은 뿌리가 바로 아뢰야식입니다.
아뢰식은 심층의식입니다. 이를 파(破)하지 못하면
화두도 선시도 알음알이로 이해할 뿐 참된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망식(妄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에 보면 비유를 든 이런 이야기 있습니다.
<목식경계품7(目識境界品第七)>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자여, 설산의 산중에 한 나쁜 짐승이 있는데
능해(能害)라고 이름합니다. 백천 가지로 변하고 속여서
모든 짐승을 잡아먹는데,
만약 암사슴이 새끼가 있는 것을 보면
문득 새끼의 소리를 내어 슬프게 울어 서로 부르며,
만약 뿔이 있는 암사슴이 나타나면 그 암사슴과 같은 모양을 하고
가서 친하도록 알랑거려
그 암사슴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면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소와 말 등 여러 종류의 짐승에게도
그 모양을 꼭 같이하여 악행을 마음대로 저지릅니다.
인자여, 일체 외도(外道)의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생긴 ‘나[我]’라는 견해도 이와 같습니다.
저 나쁜 짐승이 여러 종류의 형태로 변화하는 것과 같으며,
나는 사람이라고 집착하는
아상(我相)에 집착하는 것이 각각 차별되고,
더 나아가 지극히 작아서 오히려 작은 티끌과 같습니다.
인자여, 이 모든 아집(我執)은 어디에 머물까요?
다른 데 머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의 식(識)에 머무는 것이거늘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와 뜻과 근(根)과 경계(境界)가 화합하는 뜻 등
화합해서 식이 생긴다’라고 말하지만
본래 ‘나’라는 그것이 없으니, 옷이 꽃과 더불어 화합해야
향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옷에 향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식심(識心)과 심법(心法)이 있을 뿐 별도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근저에는
<나>라는 아집(我執)이 있고
그 아집(我執)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것이 아뢰야식이라는 것입니다.
유식으로 말한다면 근본무명(根本無明)을 파하지 못하면
사물에 대한 일체의 인식분별은
망상(妄想)이라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대승의 견지에서 말하면
근본무명을 파하는 것을 깨달음이니 원각(圓覺)이니
정각이니 하는 여러 이름이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시나 화두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음알이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보고 이해할 뿐입니다.
어떤 철학이나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사유(思惟)가 아니라 직관(直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