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

증도가(證道歌) 제45구 아란야

나그네 현림 2025. 5. 12. 13:20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나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原文~

入深山住蘭若(입심산주난야)

岑崟幽邃長松下(잠음유수장송하)

 

*蘭若 阿蘭若(아란야)와 同: 寺院의 總名이며 비구의 住處

*岑: 봉우리 잠

*崟:험준할 음

*邃: 깊을 수

스리랑카 사원

깊은 산에 들어감[入深山者]은

시끄럽고 요란하지 않은 곳에 거처하는 것이다.

난야(蘭若)에 머문다는 것을 말해 보자.

난야는 갖추어서 말하면 아란야(阿蘭若)이니,

즉 스님이 사는 집[僧舍]이다.

산봉우리가 험준함[岑崟者]은 산이 높은 모양이다.

오래된 소나무 아래라는 것은

사물 밖으로 벗어나 소요하는 경지이다.

견성(見性)한 사람은 인연을 따라 나날을 보내면서

성품에 맡겨 소요한다. 혹은 깊은 산에 들어가고

혹은 바위 계곡에 거처하면서 거처하는

처소에 따라 건립하고 일정한 방향 없이

사물에 응해도 안 되는 것이 없으니,

흰 구름과 푸른 산봉우리와 소나무 그늘과

물가가 모두 도인(道人)이 노니는 경계(境界)이다.

~남명전화상송증도가사실(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 ~

해남 미왕사 도솔암

란야(蘭若)는 아란야(阿蘭若)를 의미한다.

<대승의장(大乘義章)15>은

아란냐를 번역하여 공한처(空閑處)라 했다.

아란야 행을 한다고 함은 멀리 떨어진

공한처를 수행하기 적당한 곳으로 삼아 수행함을 의미한다.

지금은 승가(僧伽)의 선방(禪房)에서 하든

수행이 승가(僧伽)가 형성 전에는

한적한 숲이나 들판을 택해 수행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화엄경 1>은 “아란야는 보리도량이다.”라고 했다.

대승에 말하는 두타(頭陀)는

모든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고

의식주(衣食住)에 집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은 주로 걸식하는 행만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있다.

이런 두타행의 일종을 지금은 만행(萬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염불 이외의 제행(諸行)을 실천하여

왕생(往生)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속리산 관음암

아란야 행은 한적한 곳에 노닐며 몸을 가꾸고,

몸을 나로 여기고, 몸을 사랑하며, 몸을 돌보며,

몸을 생각하여 몸을 보호하려는 수행이 아니다.

아란야 행을 수행하는 것은

일체의 모든 법의 고요함을 깨달아 얻고

모든 법에 대한 집착을 끊고,

모든 낙()과 모든 생각으로 벗어나

애착하지 않고 보리(菩提)를 깨달아 얻기 위한 수행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므로

아란야를 수행하는 것이다.

 

옛 선사들이 남긴 시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될 것이다.

 

구미 금오산 약사암

공명에 뜻이 없고, 산이 좋아서

약초 개며 살기 그 몇 해인가?

소나무 우거진 깊은 안개 속에

들려오는 지초 노래 온 산이 한가하네!

~경허(鏡虛:1849~1912)선사~

마이산 고금당

한가히 산림에 누워 세상일 다 잊었네!

명리에 허덕이는 세상 사람 가엾어라.

소쩍새도 잠이 든 달 밝은 밤에

한 줄기 시냇물 소리 나의 벗일세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3)국사~

서산 죽사

동서남북 아무 데도 머문 곳 없으니

한평생 살림살이 지팡이 하나로서

혀끝에 와서 닫는 구름안개 시원한 맛

그 맛이 좋아서 산으로 들어가네!

~청허휴정(淸虛休靜;1520~1604)선사~

경남 고성 보현암

바람 잦아 머루 다래 떨어지고

산이 높아 달이 곧 지네

내 곁에 아무도 없고

창밖에 흰 구름만 자욱.

~부휴(浮休:1543~1615)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