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이야기들
삶의 길(33) 나작굴서(羅雀掘鼠) 와 적멸(寂滅)의 자비
나그네 현림
2025. 4. 19. 17:26
동물들도 싸움한다.
동물들이 싸우는 것은 단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먹이를 다툴 때와, 자기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싸우지 않는다.
더 먹으려고 탐욕을 내지 않는다.
다른 동물을 시기하거나 자기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절대로 다른 동물의 영역을 엿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이란 종은
힘으로 보면 허약한 동물군에 속하면서도 싸움을 좋아한다.
개인 간의 싸움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
그 피해가 크지 않지만, 나라와 나라의 싸움은 참혹하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하다.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는 재해이지만,
전쟁은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인위적인 재해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자연재해와 전쟁이 몰고 오는
전염병과 기근의 문제는
인간의 목숨이 파리목숨보다 더 허무하게 사라지게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道理)까지도 파괴해 버린다.
중국의 전쟁 역사를 보면 “나작굴서(羅雀掘鼠)”라는 말이 있다.
새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말이다.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은 《신당서(新唐書) 〈장순전(張巡傳)〉》에서 유래된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휘하 장수인 장순(張巡)은
천보(天寶) 말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수양성(睢陽城)을 지켰다.
그가 거느린 군사는 겨우 3천여 명,
수십만의 반란군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세가 불리해 보이자, 장손은 비장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나가 임회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원병을 요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평소 장순을 시기하던
하란진명은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몇 달 동안 포위망에 갇혀 있자,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반란군들은 갖은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면서 항복하라고 회유했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처음에는 말을 잡아먹었으나,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아먹고 땅을 파서 쥐를 잡아먹고,
갑옷과 활을 삶아 먹으며 버티는 데까지 이르렀다.
적장 윤자기가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시간이 길어지자
성안에 양식이 다 떨어져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뼈로 불을 때 밥을 짓는 등, 인심이 황황하여
자체적으로 변란이 있을까 우려되어,
장순은 애첩을 내놓아 삼군 앞에서 죽여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과부적, 결국 수양성은 함락되고,
장순은 반란군에게 살해되고 말았다.<자료출처: 나무위키>
참혹한 전쟁사이지만
그보다 앞선 진(秦)나라 전쟁사에 비교하면 이는 약과다.
진나라의 명장이라 칭송받는 백기(白起) 장군은
기원전 293년 한(韓)나라, 위(魏)와 전쟁에서 24만 명 살생하더니
기원전 264년 조나라와 전쟁 장평대전에서 승리하자
상대국인 조의 군사 45만 명을, 구덩이를 파고 매몰시켜 버렸다.
인류의 자연 재앙이라 불리는 1815년에 발발한
인도네시아 동부 숨바와섬 화산 폭발로
그 지역 원주민인 탐보라족은 아예 멸족되고,
그 여파로 60.000~120.000명이
기근과 질병으로 사망하여 세계의 재앙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 재앙 또한 인간이 인위적으로 일으킨 전쟁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현대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사를 보자.
기록에 의하면 세계 2차대전(1939~1945년)으로
소련은 2.400만 명, 중국은 2.000만 명, 독일은 770만 명
동인도(인도네시아)는 350만 명, 일본도 285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드러나지 않은 사망자를 포함한다면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 동부 벵골 지역을 통치하고 있을 때
세계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수탈 정책을 펴
2~3백만 명이 기근으로 아사(餓死) 했다고 한다.
벵골 지역은 1901년에서 40년 동안 인구가
4천2백십만 명에서 6천3십만 명으로 늘어나자
영국의 수상 처철은
‘인도인들은 토끼처럼 번식한다.”라고 비난하면서
양식을 수탈해 갔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속하는 한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자기가 악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와 나라를 위한 불가피한 선행(善行)이라고 포장한다.
사람의 마음은 열면 우주를 덮을 만큼 크지만
닫으면 바늘 하나 꽂을 곳이 없다고 말한다.
바늘 하나 꽂을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이 잔인성
이것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외치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망이 불러오는 재앙인 것이다.
이러한 재앙의 근본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은 <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몸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몸이 있기에 나의 것(我所)에 탐욕을 내는 것이다.
이 몸에 집착하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고
허망 분별을 내고, 전도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법의 근원이요 선악의 근본이다.
같은 곳에서 나왔으되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화(禍)와 복(福)으로 나뉘어 흐른다.
선(善)도 악(惡)도 모두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음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허망한 이상과 부질없는 관념을 쫓다가
결국에 무기(無記)의 세계에 빠져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아(無我), 무아소(無我所)를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것은 언제가 사라질
무상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욕망과 탐욕이란 빈 계곡에 울리는
메아리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육신이 허망하고 무상(無常)하지만
무상(無相)의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상의 자비란 적멸(寂滅)의 자비(慈悲)이니
이는 선악에도 치우치지 않고
베풂에도 <나>가 개입되지 않은 자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무상의 자비에 대하여 승조대사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중생은 본래 공한 것이지만 이를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리기에 보살이 이러한 법을 말하여
그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니,
거기에 무슨 네가 나가 있겠는가?
중생이 공한 줄을 관(觀)하면
그를 제도하는 심행(心行)도 또한 공(空)한 것이다.
이 공한 마음을 가지고 공한 가운데에 행하는 것이
무상(無相)의 참다운 자비이다.
만일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이 있어
이를 자비한 마음이라 하다면
이는 헛되고 속이는 자비이니 새삼 무엇을 말하겠는가?」
<아(我)>도 버리고, 버렸다는 그것마저 버렸을 때
참다운 자비행이 일어났다.
그 자비를 적멸의 자비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