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진천 길상사(吉祥祠)
나그네 현림
2021. 12. 7. 20:17
진천을 지날 때마다 길상사란 표시판을 보았지만,
처음에는 신흥사찰인 줄로만 알고 그냥 지나쳤는데
진천 사곡리 마애여래입상을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있어 들렸더니 일주문 대신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사찰이 아닌 김유신 장군의 사당이었다.
홍살문(紅살門)은 능(陵)·원(園)·묘(廟)·궁전·관아 등의
정면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으로
홍전문(紅箭門),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길상사(吉祥祠)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1호(1975.02.21. 지정)
건립 시기 : 1926년(재건)
성격: 사당
본전(흥무전): 정면 5칸, 측면 2칸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 도당산
길상사는 진천 도당산에 있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흥무대왕 김유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때부터
김유신의 태가 묻힌 태령산(胎靈山) 아래 사당을 건립하고
국행제(國行祭)를 지내오다가,
1408년(태종 8)부터 관행제(官行祭)로 치제(致祭)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병화를 입어 폐허가 된 것을
1851년(철종 2) 백곡면 구수리 개죽마을에
죽계사(竹溪祠)를 세워 모셨으나 고종 초에 훼철되었으며,
다시 도당산성(都堂山城) 아래에 서발한사당(舒發翰祠堂)을 건립하였으나
1922년 대홍수로 무너져, 1926년 현 위치에 재건하고 길상사라 하였다.
1954년에는 『길상사지(吉祥祠誌)』를 발간하였으며,
1957년에 흥무대왕신성비(興武大王神聖碑)를 세웠다.
1959년에 전면 개축하고, 1975년 중건하였다.
재실이다.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길상사는 2개의 문이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인데 위 사진은 외삼문 전경이다.
외삼문 뜰 앞에는 길상사 중건 사적비와 김만희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김만희 공적비는 1851년(철종 2년) 백곡면에
김유신 사당으로 지어진 죽계사가 고종 원년에 철폐되었던 것을
1926년 김유신의 후손인 김만희의 주선으로
삼국시대 석축산성인 도당산성 자락인 현재의 터에
길상사를 세운 것을 기리는 의미이다. 지금의 길상사는 1959년에 개축하였고,
1975년에 대대적으로 새롭게 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정립했고,
그해 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 1호로 지정된 것이다.
외삼문은 길상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외삼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다.
내삼문에는 진호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길상사의 본전이 나온다.
편액은 진호문으로 되어 있다.
본전인 흥무전(興武殿)은 콘크리트조 기와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주심포(柱心包) 팔작집인데,
그 안에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앞뜰에 김유신장군사적비가 있고,
입구에는 길상사 중건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김유신은 만로군 태수 김서현의 아들로 진천에서 출생.
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이 되었고 진덕여왕 때는 백제 12성을 함락하여
상주행군대총관에 오르고 무열왕 7년 상대등으로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 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태대각간이 되었으며
한수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고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왼쪽에 보이는 비석이 흥무대왕신성비다.
@흥무대왕신성비는 1957년 이선근이 비문을 짓고 김만희가 글씨를 쓴 것이다.
우측에 세워진 김유신장군사적비는 1976년 이은상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김충현 작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의 종손이었다.
구해왕(仇亥王)은 양왕(讓王)으로 불리며 521년 제위에 올라
11년 후 532년 신라 법흥왕 때 아들 셋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하여 진골에 편입된 가야국의 마지막 왕이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다.
그의 무덤은 구해왕의 유언에 따라 돌무덤으로 조성되었고
현재 산청군 금서면에 있다.
입구에는 김유신의 비가 세워져 있다.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은 백제 성왕을 전사시킨 장군이였으며,
부친은 김무력의 장남 김서현이고
모친은 진평왕의 동생 숙흘종의 따님 만명부인 이었다.
문화재 지정: 산청 전 구형왕릉. 문화재지정: 사적 제214호(1971.02.09 지정)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며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
<新羅太大角干純中壯烈 與武王金庾信射臺碑(신라태대각순중장령여무왕김유신사대비)>
위치; 경남 산청군 금서면 구형왕릉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 서로 야합하였는데,
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갈 때 데려가려 했으나,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벼락이 쳐서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서
정신을 잃은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떠났다.
그래서 김유신은 진평왕 17년 지금의 충북 진천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에 대한 설화나 이야기는
주로 〈삼국사기〉 열전과 〈삼국유사〉, 〈파한집〉, 〈동경잡기〉,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다. 구전설화는 그가 활약했던
경북 경주시 일대와 백제 땅이었던 전라북도 지방에 전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천관녀와 얽힌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천관녀(天官女)는 신라 진평왕 시대의 김유신(金庾信)이
화랑 시절에 정을 두고 있던 기생으로
그녀가 지었다는 《원사(怨詞)》라는 향가의 저자이기도 하다.
원사(怨詞) 또는 천관원사(天官怨詞)라고도 불리는 이 향가는
화랑도 시절의 김유신(金庾信)이 한때 천관녀에게 정신이 팔리며 수련을 게을리하자
김유신이 어머니 만명부인의 꾸지람을 들은 후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던 어느 날 밤,
유신랑(庾信郞)이 술을 마시고 취기(醉氣)에 말(馬)을 타고 귀가하였는데,
아직도 말은 예전 습관처럼 천관녀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김유신은 술이 깨어 자신이 탄 말의 목을 검(劍)으로 베었는데,
천관녀가 김유신의 모진 무정함을 원망하면서
지은 향가가 저 유명한 원사(怨詞)라는 향가이다.
혹자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른 효성과 그의 과단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겠지만
온종일 그를 기다리는 여인 천관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당시의 성문화가 경합이리(輕合易離)라 하지만
이는 사대부의 전용이지, 어찌 여심의 마음이 그러할까.
분노와 배신, 그리고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그리움의 불길을 담아
그녀의 심정을 뱉어 낸 원망의 시가 바로 <원사(怨詞)>인데
불행히도 전문은 전해오지 않고 그 내용만
고려 시대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속에
이공승(李公升) 시속에 수록되어 있다.
《파한집》에는 기생 천관이 자신을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김유신을 원망하며 지은 원사(怨詞)가 있었다고 했지만 전해지지 않고,
다만 이공승의 천관사라는 시 속에 수록된 그녀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천관사(天官寺)
寺號天官昔有緣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술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김유신의 배신으로 생이별을 한 후 그녀가 살았던 집은
그곳에 천관사라는 절이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절마저 무상한 세월 속에 묻혀 버렸는데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8세기 중후반경으로 판명되는
팔각형 탑신부 형태의 탑 터가 확인되었고,
이 밖에 건물터 5곳, 문터(추정) 1곳, 석등터 1곳, 석조시설 2곳,
우물 3곳과, 많은 초석적심석과 유물로써 금동불상을 비롯해,
천(天)자명 명문기와도 수습되었다
천관녀는 흔히 말하는 기생이나 술집 여인이 아니고,
가야의 귀족으로 태종 무열왕의 휘하에 있던 천존장군의 누나라고 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유신의 지지와 추대로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다.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고, 김유신의 나이는 60세라고 한다.
그다음 해에 김유신은 김춘추의 왕녀요 자신의 생질녀인
지소와 혼인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김유신은 천관녀와 헤어진 후 독신으로 살다가 60세가 넘어서야
김춘추의 딸 지소와 혼인한 것이다.
15세에 화랑에 들어가고 16세 때에 천관녀를 만났으니
참으로 긴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런데 김유신에게는 본인도 모르던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기벌포 전투의 영웅 김시득 장군이었다.
이 사실은 천관녀의 동생인 천존 장군과 진지왕의 서자인 비형랑만이 알고 있었다.
천존은 자기 누나를 버린 김유신 장군이
오릉 동쪽 천관의 집터에 천관사를 짓는 것을 보고,
자기 누나를 그리는 마음이 너무나 애틋함을 알고,
감동을 받아 천관이 낳아서 다른 가문에 입양시켰던
김시득에 대해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김시득과
서로 부자로 상봉하게 되었지만, 김유신 장군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노환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화장실 옆에 미완성인 승탑이 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솜씨로 다듬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