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의왕 청계사(淸溪寺)
나그네 현림
2021. 7. 10. 17:04
의왕 청계산은 수도권 등산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산 중 하나다.
해발 618m로 옛적에는 청룡산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 산 들머리에 청계사(淸溪寺)가 있다.
청계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이유에는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극락보전의 관음보살상에 우담바라 피었다는 것인데
이는 신비한 것을 즐기는 호사가(好事家)들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라는 경허 선사가 출가한 절이기 때문이다.
사실 위대한 고승이나 선승들의 처음 출가한 사찰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옛적에 달마의 법맥을 이은 혜가스님이 출가했다는
낙양 향산사를 들린 적이 있는데 그 절 어느 곳에도
혜가스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어 서운했는데,
청계사 역시 경허 스님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다만 최근에 조성한 부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의왕 청계사는 남북국시대의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한국민족백과대사전>에 의하면: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대찰의 모습을 갖춘 것은
1284년(충렬왕 10) 시중 조인규(趙仁規)가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중창하고 그의 원찰로 삼은 뒤부터이다.
그때부터 이 절에는 100명이 넘는 수도승이 상주하였다.
자손들이 여기에 그의 사당을 짓고,
전장과 노비를 두어 대대로 제사를 지냈다.
1407년(태종 7) 조정에서는 이 절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하고
천태종에 소속시켰으며, 1431년(세종 13) 조인규 영당을 중건하였고,
연산군이 도성 내의 사찰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을 때
이 절은 봉은사(奉恩寺)를 대신하여 선종본찰(禪宗本刹)의 기능을 행하는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場)이 되었다.
광해군 때는 이 절의 소속 전장과 노비를 모두 관에 소속시켰고,
1689년(숙종 15) 3월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탔을 때 성희(性熙)가 중건하였다.
1761년(영조 37)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이 절에 원당을 설치한 뒤 밤나무 3,000주를 심고 원감(園監)을 두었으며,
1798년(정조 22) 조무의(趙武毅)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1876년(고종 13) 3월 26일 실화로 수십 칸의 건물이 소실되자
4년 후인 1879년에 음곡(陰谷)이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종교 탄압정책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이어 오다가
1955년 비구니 아연(娥演)이 주지로 취임한 뒤 중창을 시작하였고,
월덕(月德)·탄성(呑星)·월탄(月誕) 등이 그 뜻을 이어 당우를 회복하였다. 』
조약돌로 조성한 와불이 특이한 의왕 청계사의 현존하는 당우로는
만세루,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 지장전, 선불장,
종각, 수각(水閣)과 요사채가 있다.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정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 - 의왕청계사동종》 - 보물 제11-7호
《청계사소장목판》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의왕 청계사 신중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4호
《의왕 청계사 청계사사적기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88호
《의왕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6호
의왕 청계사는 일주문이 없고 경내 진입하는 계단 좌우에
석조 사천왕을 배치하고 있다.
경내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보이는 2층 누각형태의 건물이 만세루다.
만세로 뒤편 편액은 설법전이다.
극락보전
1900년(광무 4년)에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처마는 이중 겹처마로 주포식 팔작지붕이다.
수미단에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신중탱과 아미타7존불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우담바라는 아미타불의 좌협시인 관음보살상에서 피였다는 데
지금은 그 흔적을 볼 수 없다.
아미타불은 통견으로 안에는 승각기를 입고, 양팔은 가사로 덮고 있다.
관음보살은 지물인 정병을 들고 있는데 따로 조성하여 끼워 놓았다.
이는 금단사의 관음불과 같이 조선 시대 불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통상 아미타불상을,
대세지보살의 보관에는 보병을 묘각하는 데 여기서는 묘각하지 않았다.
의왕 청계사 신중도(義王淸溪寺神衆圖)
시대: 조선 후기
문화재지정: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4호
창작/발표 시기: 1884년(헌종10)
크기: 세로 159.5㎝, 가로 194.0㎝
재질: 견본채색(絹本彩色)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을 그린 신중도로
제석천과 범천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권속들로 구성된 형식의 그림이다.
화기를 통해 1844년(헌종 1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세로 159.5㎝, 가로 194.0㎝ 비단 바탕에 채색을 베푼 불화로,
2012년 6월 26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을 그린 신중도는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불화이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조선 시대 신중도는 18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다.
신중도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과 같은 주불전
또는 보살이나 나한을 모신 부속 전각에 봉안하여 전각을 수호한다.
전각 안에 신중도가 걸릴 때는 불단(佛壇)을 바라보고 한쪽 옆벽에 걸리는데,
이곳은 조선 시대 불화를 봉안하는 단(壇) 가운데 중단에 해당하며
불가에서는 이곳을 '신중단(神衆壇)'이라 한다.
의왕 청계사 신중도는 화면 가장 위쪽에는 광배를 갖춘 제석천과
범천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주악 및 공양물을 받쳐 든 천동과
천녀들이 병풍을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어 구름을 경계로 그 아래쪽에는 화면 가운데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중과 대관집홀상(戴冠執笏狀)의 왕들을 그렸다.
제석천과 범천, 위태천으로 구성된 역삼각형 구도의 신중도는
조선 후기 신중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이나,
천룡팔부중을 비롯한 무리가 두 줄로 늘어설 만큼 확장되어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 그림과 같이 위태천의 비중이 제석천과 범천에 비교해 높아지거나
다양한 신들이 추가로 그려지는 복잡한 구성은
19세기 신중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1844년(헌종 10)에 조성된 이 그림은 존상 표현에 있어
타원형의 얼굴 표현, 세장한 신체 묘사, 이목구비 음영 표현,
코발트색과 금니를 사용하는 색채 표현 등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경성(京城) 화파의 화풍이 반영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인정된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의왕 청계사 동종(思印比丘製作銅鍾-儀旺淸溪寺銅鍾)
제작 시기: 1701년
문화재지정: 보물 제11-7호
크기: 전체크기 115cm, 입지름 77cm, 종신 높이 96cm
청계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종이다. 조선 숙종 27년, 1701년에 제작되었다.
1980년 6월 2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96호 청계사 동종으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2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중량 700근의 대종(大鐘)으로 원래 청계사에서 주성(鑄成)되었던 것인데,
봉은사(奉恩寺)에서 사용하다가 1975년에 본래의 장소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전체적으로 푸른 빛이 감도는 세장(細長)한 종으로,
형태는 쌍룡(雙龍)의 종뉴(鐘鈕) 아래 띠 장식대가 가미된 종신이 연결된 모습이다.
장방형의 종신은 그 외형선이 종복(鐘腹)의 띠 장식대까지 벌어져 내려오다
구연부를 향하여 약간 오므라드는 선형(線形)을 취하고 있어
종복 부분이 팽창되어 보인다.
표면구조는 띠 장식대를 중심으로 위쪽에는 견부(肩部)에 상대(上帶)가 있고
그 아래에 4 유곽(乳廓)과 4보살상이 교대로 배치되었으며,
아래쪽에는 구연부에 붙어서 하대가 있고,
그 위에는 명문(銘文)이 돋을새김 된 배치방식을 하고 있다.
그 세부 표현수법을 살펴보면 종뉴인 쌍룡은 얼굴,
빈약한 몸체, 다리 등에서 다소 쇠잔한 느낌이 들며 자세는 경직된 편이다.
상대의 문양은 저부조(低浮彫)의 돋을새김 초화문(草花文)으로,
뾰족한 4엽화문(四葉花文)이 가느다란 줄기, 날카로운 이파리와 어우러져 있으며,
기하학적으로 도식화된 18세기 초의 다른 종들에 비교하여 생생한 느낌이다.
유곽은 저부조의 초문유곽대(草文乳廓帶)와
곡선으로 된 5엽화문 종유(鐘乳)로 구성되었다.
보살상은 연화 가지를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인데,
한 개의 문양판을 이용하여 네 곳에 시문하였다.
이러한 보살상은 법주사종(法住寺鐘, 1636)·금룡사종(金龍寺鐘, 1670)·
통도사종(通度寺鐘, 1686) 같은 17세기의
승장계열(僧匠系列)의 몇몇 종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띠 장식대는 조선 초기부터 보이는 외래적 요소로
똑같은 굵기의 두 줄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下帶)는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이 장식되었는데,
줄기를 중심으로 만개하거나 잎이 뒤로 젖혀진 두 가지 형의 연화를
교대로 배치하여 율동감이 느껴진다.
18세기 초 외래 유형의 종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명문에 의하면 숙종 대에 경기도·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승장 사인비구(思印比丘)의 노년기 작품으로서,
명간(明侃)·계일(戒日)·여석(餘釋)과 함께 주성하였다.
사인비구는 수타사종(壽陀寺鐘, 1670)·통도사종·강화동종(江華銅鐘, 1711) 등
모두 8구의 종을 남기고 있다.
청계사 동종은 기존의 동종과 비교하면 2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하나는 종정부(鐘頂部)인데 고려 전기 범종
’청녕4년명동종(淸寧四年銘銅鐘)
에서 보듯 일반적으로 용두(龍頭) 하나에 용통(甬筒)이 있는데
청계사 동종은 쌍용으로 용뉴(龍鈕)가 조성되고 용통이 보이지 않는다.
둘은 종을 치는 당좌(撞座)가 조성되어 있는데
청계사 동종은 당좌가 없다는 것이다.
@ 명칭 : 청녕4년명동종(淸寧四年銘銅鐘)
• 지정 : 보물 제1166호
• 조성연대 : 고려 문종 12년(1058)
• 제원 : 전체높이 83.2㎝, 종신 62㎝, 입지름 55㎝, 무게 : 90kg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주와 연화장을 든 지장보살상을 중앙에 두고
지장보살상 뒤에 지장탱을 봉안했다.
지장탱은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그 위에 시왕과 권속들을 배치했다.
@조약돌로 쌓은 석가세존 와불상은 1999년 주지 지명 스님이 조성한 것이다.
조성비에는 <국난극복, 민족화합, 세계평화, 법륜상전>을 밝히고 있다.
좌서상(左敍相)의 유희좌(遊戲坐)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상.
보관에는 아미타불상이 묘각되어 있다.
연등을 만(卍)형으로 조성하여 달은 것이 이색적이다.
@삼성각
삼성각에는 독성과 산신, 치성과 여래(칠성)를 봉안하고 있다.
칠성탱은 중앙에 법륜을 든 치성광여래를 따로 조성해 놓았다.
탑과 석주 등 부재들을 모아 쌓은 석탑
지장전 뒤편에 난 오솔길을 따라 청계산 등산로의 전망대까지 걸어 보왔다.
의왕 청계사는 근대 한국불교 선 중흥조 경허 스님 출가 사찰로
스님의 선맥을 이은 만공, 보월, 금오, 월산 스님 등 선사 5명을 함께 추모하기 위해
승탑을 조성하고 매년 다례제를 봉행하고 있다.
부도전에는 청계사 청계사사적기비(義王 淸溪寺 淸溪寺事蹟記碑)와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義王 淸溪寺 趙貞肅公祠堂記碑)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의왕 청계사 청계사사적기비(義王 淸溪寺 淸溪寺事蹟記碑)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사에 있는 사적기비는
2014년 5월 9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1689년(숙종15)에 제작된 청계사의 연혁을 기록한 것으로
1689년 청계사 입구에 세워졌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비신을 만들었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머릿돌을 얹은 양식을 취하고 있다.
높이 176㎝ 너비 92㎝, 두께 27㎝로 찬자(璨者)는 조운,
글씨는 윤창적에 의해 쓰여졌다.
전체적으로 비교적 글씨가 마모되지 않고 잘 남아있어
내용을 알아보는데 어렵지 않으며 탁본을 떠 의왕향토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청룡산의 청계사는 고려 시중
조정숙공의 별장이라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정숙공은 조인규를 가리키는 말로써 조인규의 사람됨과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고 조인규와 원나라 황실과의 관계가 나타나 있으며
청계사를 창건하여 왕을 축원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
조인규사당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비문의 끝부분에서 청계사는 1689년 (숙종 15)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하였다는 사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의왕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義王 淸溪寺 趙貞肅公祠堂記碑)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사에 있는 고려 시대의 비석로
2014년 5월 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碑)는 고려 시대 1341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12번지 청계사 경내에 있다.
사당을 만들게 된 과정을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이은 글을 사당기(祠堂記)라고 하며, 이를 비석에 새긴 것을
사당기비(祠堂記碑)라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77cm,
너비 48cm, 두께 18cm로 찬자(撰者)는 이곡, 글씨는 왕수성이 썼다.
전체적으로 앞면과 뒷면 모두 마모가 심하여 글씨를 모두 알아보기 힘들지만,
뒷면에 새겨진 글자 일부가 선명하게 남아있어 내용 일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석의 앞면에 비명인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肅公祠堂記碑)가 새겨져 있고
비문과 같은 내용이 이 비석의 찬자(撰者)인
이곡의 문집 가정집(稼亭集)에도 실려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찬자인 이곡이 어떻게 비명과
비문을 짓게 되었는가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조인규의 일대기를 적어 놓았고 마지막 부분에
청계사를 짓게 된 경위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비문은 조인규와 충렬왕의 관계를 비롯하여
당시 고려와 원나라와의 대외관계,
청계사의 창건이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