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국립공주박물관 (제2부) 무령왕릉의 껴묻거리(副葬品)
나그네 현림
2021. 6. 5. 10:00
부장품(副葬品)이란 말은 쉽게 이해되지만,
껴묻거리는 말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진다.
껴묻거리는 무덤에 시신을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품을 말하는
부장품(副葬品)에 대한 순수한 우리 말이다.
고분(古墳)에 껴묻거리를 함께 묻는 습관은
인간이 사후세계에서도 생전과 같이 생활한다고 믿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갖추는 데서 연유하였다.
이 습관은 중기 구석기시대
무덤에서부터 나타나는 아주 오래된 장례 풍속이다.
삼국시대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종류와 수량이 부장되었는데,
경주의 황남대총 등 대형고분에는 2∼3만 개가 넘는 유물이 부장되었고,
무령왕릉에서는 3천여 개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순금제·은제·동제·철제·옥류 등 고가의 미술품이 부장되었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경우는 토기를 중심으로 한 제사용 용기 등은
시신이 들어가는 현실의 머리맡 발치께,
그렇지 않으면 시신 곽 밖의 근거리 공지에 부곽(副槨)이라고 하는
껴묻거리 전용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 신라·가야지역 무덤의 시신이나 관 밑에
덩이쇠[鐵鋌] 수십 개∼수 백 개씩 깔기도 한다.
무령왕능의 널방[墓室]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는데,
남북방향을 축으로 한 긴 네모꼴의 평면을 갖고 있다.
남북길이 4.2m, 동서너비 2.72m이며 높이는 2.93m이다.
긴 벽인 동·서벽은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
아치 모양으로 만곡하며 짧은 벽인 남·북벽은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다.
왕과 왕비 모두 옻칠된 목관에 각기 안치되어 있었는데
목관 표면은 꽃 모양의 금·은제 장식으로 꾸몄다.
널길에는 돌로 만든 석수(石獸) 1마리가 입구쪽을 향해 놓여 있었으며
그 앞에는 왕과 왕비의 매지권(買地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장
신구로서는 왕의 것으로 금제 관장식, 심엽형 귀걸이,
뒤꽂이, 은제 허리띠[銙帶], 금동 신발 등이 있으며
그밖에 각종 금·은제 장식이나 구슬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무령왕릉에서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소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연대가 확인된 유물로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무령왕릉을 비롯한 백제 시대 무덤에서는
가끔 중국 도자기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순수하게 매장할 목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하여 무덤에만 부장한 것들이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로는 불교의 영향으로 껴묻거리는 점차 작아지고,
고려 시대에는 더욱 적어져서
약간의 도검류와 토기·자기류가 부장되어 전체적으로 빈약한 감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6세기 전반 백제문화의 수준과 묘제,
사장 등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무령왕능 지석 (武寧王陵 誌石:묘지석): 국보 제163호
사진에서 엽전 3꾸러미 밑에 놓인 2개의 판석이 무령왕릉 지석이다.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진묘수/무령왕능석수(武寧王陵石獸) 국보 제162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만들어진 석수이다.
석수(石獸)란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한다.
무령왕릉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금송목관
무령왕과 왕비가 붕어했을 때 왜(倭:일본)에서 들어왔다는
금송(金松)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금송의 수령은 지름 130cm, 수령은 3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백제와 왜(일본) 가 당시 친밀한 외교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비 관꾸미개 국보 제155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왕의 관식과 함께 출토된 왕비의 금제 관(冠)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투조(透彫)로 표현된 문양은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정돈되어 정연한 느낌을 준다.
문양은 중심부의 연꽃 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있으며,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솟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 관꾸미개(금제관식): 국보 제154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 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 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비의 금귀걸이: 국보 제157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귀고리 2쌍으로 길이는 11.8㎝, 8.8㎝이다.
왕비의 귀고리로,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작은 장식들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으로 길고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있고,
다른 한 쌍은 1줄로만 되어있다. 앞의 귀고리 중 긴 가닥은
금 철사를 꼬아서 만든 사슬에 둥근 장식을 많이 연결하였으며,
맨 밑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8개의 둥근 장식을 달고
그 아래 탄환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이나 탄환 장식은 달지 않고,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담녹색의 둥근 옥을 달았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에 각 1쌍씩 보관되어 있다.
2쌍. 길이 각각 11.8㎝, 8.8㎝.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가는고리식[細環式] 귀걸이로 1쌍은 길고
짧은 2줄의 드리개가 달려있으며 다른 1쌍은 드리개가 1줄뿐이다

무령왕 금귀걸이 국보 제156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의 금귀걸이 한 쌍으로 길이는 8.3㎝이다.
왕의 널(관)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2가닥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 장식은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잎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었다.
옆으로 보면 안이 굽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 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둘렀다.
다른 한 가닥은 여러 개의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무령왕 금제뒤꽂이: 국보 제159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뒤꽂이 일종의 머리 장신구이다.
무령왕릉 나무널(목관) 안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는 18.4㎝, 상단의 폭은 6.8㎝이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삼각형 모양이며,
밑은 세 가닥의 핀 모양을 이루고 있어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삼각형의 윗부분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고,
3가닥으로 갈라진 꽂이 부분은 긴 꼬리처럼 되어있어
마치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 날개 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무늬를 빈틈없이 메꿔 놓았다.
새의 머리와 날개 부분의 테두리는 끌 끝으로 찍은 작은 점들이 열을 지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문양은 모두 뒤에서 두들겨 솟아 나오게 한
타출법(打出法)을 사용하였고, 세부 표현에는 선으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의 머리 부분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3개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의례 때 쓰인 머리 장식품으로 보인다.


무령왕비 금목걸이: 국보 제158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비의 목걸이로,
길이는 각각 14㎝, 16㎝이다.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는데,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활 모양으로 약간 휘어진 육각의 금막대를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고 다른 것과 연결했다.
고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을 짧은 목걸이의 경우 10∼11회,
긴 목걸이는 6∼8회 감아서 풀리지 않게 하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무령왕비 은팔찌 국보 제160호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 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팔찌의 외관을 감싸고 있는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명문에 의하면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의 이름과 무게 등이 기록되어 가치가 높다.
용의 조각이 웅건하면서 만든 시기와 작가,
중량까지 기록된 삼국시대의 유일한 팔찌로서
고대 금속공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은제팔찌는 왕비의 왼쪽 팔목에 끼웠던 은으로 만든 팔찌로
팔목이 닿는 안쪽의 테두리 부위에는 수직의 짧은 선 무늬를 가지런히 돌렸고
내면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라는
명문이 들어 있어서 이 팔찌가 다리라는 공인이 대부인,
즉 왕비를 위해 경자년(520)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비의 두침(頭枕) 국보 제164호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왕비의 머리를 받치기 위한 장의용 나무 베개로,
위가 넓은 사다리꼴의 나무토막 가운데를 U자형으로 파내어
머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길이 40㎝, 높이 33.7㎝.
표면에는 붉은색 칠(朱述)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무늬를 만든 다음,
그 무늬 내부마다 흑색·백색·적색 금선을 사용하여
비천상이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봉황,
어룡(魚龍), 연꽃, 덩굴무늬 등을 그려 넣었다.
베개의 양옆 윗면에는 암수 한 쌍으로 만들어진
목제 봉황 머리가 놓여 있는데, 발굴 당시에는
두침 앞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부착하였다.

왕의 머리 받침은 거의 부식되어 두 토막만이 남아 있는 것을 보완한 것이다.






불상대좌(佛像臺座)
출토: 청양 본외리 가마터
시대: 백제
1986년 청송군 본외리에 있는 백제 가마터에서 발견되었다.
파편의 복원결과 높이 1m, 폭2.8m의 초대형 불상대좌로 밝혀졌다.
옷자락은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좌우 대칭이다.
이러한 양식은 일본의 불상 받침에 전승되어
백제불교 미술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이라 지장보살상으로 보이는 데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좌대가 독특한 이 불상의 형상은 양양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9세기 작)의 좌대와 흡사하고
가사 형태는 국보 제82호인 감산사 금동미륵불입상을 닮았다.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국보 제82호인 감산사 금동미륵불상을 닮았다.
좌대는 위의 사진에서와 같은 양양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의 좌대와 비슷하다.



사진 우측의 사진은 반자(飯子) 또는 금구(金口)로 불리는 금고(金鼓)로
기사(己巳)가 새겨진 청주 운천동절터 출고 금고(고려시대)와 비슷하다.

불보살상과 사리장엄구
불보상은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고려 시대 불상은 통일신라 불상의 전통을 따르는 한편,
지방 양식도 나타난다.
또한, 사리장엄구도 청자로 사리함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수정으로 사리병으로 만들기도 했다.
(1) 관음보살상/ 청양 본외리(사진 우측 상단)
(2)소조상편(塑造像片)/보령 성주사터(사진 좌측 3기)
@소조상편(塑造像片): 보령 성주사터출토, 1972년 출토. 시대는 고려.
성주사 삼전불전 터에서 출토된 소조상편이다.
소조상은 흙으로 빚어 만든 것으로 바탕흙에는 지푸라기 등이 섞여 있다.
삼천불은 시 공간을 초월해 무수한 부처자 존재한다는
천불(千佛) 신앙이 발전해 과거, 현재, 미래로 확대된 개념이다.
당시 삼천불전에 소조상이 삼천 개 이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는 130여 점이 발견되었다.
(3)사리외함/서산 보원사 터(사진 우측하단 오른쪽)
(4)사리내함/서산 보원사터(사진 우측하단 좌측)
(5)사리병/ 서산보원사터(사진 우측 하단 중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