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포천 명성산 자인사
나그네 현림
2021. 3. 27. 21:16
자인사는 포천의 명소 산정호수와
갈대로 유명한 명성산(鳴聲山)의 바람을 타고 알려진 사찰이다.
산정호수 들머리 우측에 위치하며, 명성산 등산로의 들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명성산(鳴聲山)은 갈대로 유명하지만 왕건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전쟁에 실패하여 패전의 울분으로 이곳에서 울음을 울었다는
슬픈 전설을 지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자인사 창건내력은 홈피에 의하면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궁예가 머물렀던 곳에
작은 암자를 세워 신성암(神聖庵)이라 부른 것이 효시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전란에 휩싸여 폐사된 것을 충렬왕 3년(1227년) 다시 중건하여
절 이름을 왕건의 자호를 따 약천암(若天庵)이라 하였다.
그 후 다시 전란으로 소실되어 폐사되었던 것을
1964년 김상수(법명: 海空)라는 스님이 옛 암자의 터에
작은 법당을 세우고 자인사(慈仁寺)라 하였다.
이때 석고로 미륵불상을 조상했다고 하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자인사의 慈는 궁예가 기원한 미륵 세계를 기리는 마음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仁은 궁예와 왕건의 숙원을 풀어 악연의 고리를
靈界에서 풀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1993년 정영도(법명: 원각) 스님이 석고 미륵불상이 있는 곳에
극락보전을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요 전각은 관음전, 삼성각, 극락보전과 삼소굴이 있고
요사채와 종무소가 있다.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면 부도전이 나온다.
지금의 자인사를 창건주로 알려진 해공당대종사(海空堂大宗師)와
원각당영도대종사(圓覺堂暎道大宗師)의
승탑(부도)과 탑비가 사적비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잿터바위
서기 905년 고려의 태조 왕건이 태봉국 궁예왕의 수하부장으로 있을 때
궁예왕의 명으로 후백제의 금성(지금의 광주)을 공격하러 가기 전에
이 바위에다 제물을 올리고 산제를 지낸 후 현몽을 받아 승전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이 바위는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국가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기원했던 바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곳을 '재를 올린더(잿터절)' '잿터바위'라 하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하게 되어
이 바위를 중심으로 절을 지어 현재까지 중생을 교화하여 오고 있다.

음양오행상으로 보았을때,
이 바위는 (계단에 오르면서 보시라!)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의 모양으로서
반대편의 개구리 (개구리모양의 바위)를 낚아채기 직전의 형상이라 하여
형국풍수로 이곳이 명당명혈임을 증명하고 있는 지석 증표라고 한다."


지금의 자인사 대웅보전 앞에는 포대화상이 없지만
옛적(2008년) 필자가 방문할 때만 하드라도
대웅보전 앞에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형상은 포대화상인데 조상 밑에 <미륵불>이라고 명시되어 있어
다소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포대화상은 여러 경전에 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에서는 미륵불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는 보살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포대화상은
불교설화에 가공된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이다.
포대화상의 이름은 계차(契此)이고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사람이라고 한다.
일찍이 절강성 악림사(岳林寺)에 출가하여
서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호는 정응대사(定應大師)다,
사람들은 그를 장정자(長汀子), 또는 서달 포대화상이라 불렀으며
줄여서 포대사(布袋師)라고도 불렀다.
장정(長汀)이란 긴 진흙 수렁을 말하는 데
포대화상은 두서없이 아무 말이나 잘 지껄이며 다녔기에
사람들이 붙인 별호이며, 또 포대화상(布袋)이라 불린 것은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는 얼굴로 풍선처럼 늘어져 배로, 다닐 때는
늘 지팡이 끝에 커다란 자루(포대)를 늘 둘러메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중국의 일부 사찰에서는 포대화상의 형상을 미륵불로서 많이 모시고 있는데
특히 절강성 악림사 입구에 있는 참선의 자세로 크게 웃고 있는
포대화상의 형상이 유명하다. 소불(笑佛)이며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모셔진 포대화상 입상 곁에는
<(포대화상의)배는 천하가 품기 어려운 일도 다 포용할 수 있고
늘 웃는 그 입은 세상의 가소로운 인간을 비웃는구나>
라는 글을 두고 있다고 하며
지금도 악림사(岳林寺)의 동당(東堂)에는
그의 전신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본방 대 자유인 포대화상 참조)



삼성각
극락보전 좌측 조금 아래에 있다.
전면 3칸, 측면 1칸 주포식 맞배지붕으로
법당 안에는 치성광여래와 산신, 독성을 봉안하고 있다.








극락보전
전면 5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자인사의 본당 역할을 한다.
수미단 위에는 본존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일반적인 극락보전과는 달리
아미타불 옆에 두 협시보살을 모시는 것 외에 두 동자상을 둔 것이 특이하다.











관음전
관음보살은 여러 몸으로 중생을 위해 나투시는 보살이다.
이를 통상 33 관음이라 하며,
그 자비행은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형상으로는 육관음으로 분리한다.
자인사의 관음전에는 설악산 신흥사 내불당처럼
육관음 중 3분의 존상(尊像)을 모셨다.
육관음(六觀音)은 6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나타낸 6종의 관음.
성관음, 천수관음, 마두관음, 11면관음, 준제관음, 여의륜관음을 일컫는다.







삼소굴
사찰을 다녀보면 삼소당(三笑堂)이나
삼소암(三笑庵)이란 편액이 걸린 전각을 흔히 볼 수 있다.
자인사는 삼소굴(三笑窟)이라고 명명했다.
이 삼소(三笑)라는 말의 어원은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호계(虎溪)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
여산(廬山) 서북쪽 기슭에 있는 동림사(東林寺)라는
절 앞을 흐르는 계곡 이름이다. 동림사라는 절은
동진(東晋) 때 여산의 고승 혜원(慧遠:335~417)의 도반이었던
혜영(慧永)이 먼저 여산의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다가
혜원을 이곳으로 오게 한 후 당시의 자사 환이(桓伊)에게 부탁해
산의 동쪽에 혜원을 위해 다시 지은 절이라고 한다.

호계삼소란 말이 생긴 유래는
동림사에 수행하던 여산의 고승 혜원(慧遠)은
항상 “내 그림자가 대문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고
발자국은 속세에 들여놓지 않겠다.
손님을 배웅하더라도 호계 다리를 넘지 않겠다
.(影不出戶,跡不入俗,送客不過虎溪橋)”고 하였는데
어느 날 찾아온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도사 육수정(陸修靜, 406-477)과 환담하고 돌아갈 때
두 사람을 배웅하면서 이야기에 취한 나머지
이 호계를 지나처버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 하여 생긴 말이다.
이 이야기는 송(宋)나라 진성유(陳聖兪)의 《여산기(廬山記)》에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