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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산실(産室) 군위 인각사(麟角寺)

나그네 현림 2020. 7. 9. 22:14

삼국유사의 산실(産室) 군위 인각사(麟角寺)

 

군위 인각사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산(華山)에 도로변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창건은 642년(선덕여왕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기록과

643년(선덕여왕 12)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두 기록이 남아 있다.

인각사 절터의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통일신라 시대에는

거대한 사찰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사명(寺名)의 유래는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307년(충렬왕 33)에 일연(一然)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였다.

당시 이 절은 크고 높은 본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 등이 있었고,

본당 뒤에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연은 총림법회(叢林法會) 등 대규모의 불교 행사를 개최하였다.

시대는 미상이나 조정의 명으로 김용검(金龍劍)이 절을 크게 중건하고

밭 100여 경(頃)을 헌납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총림법회를 자주 열고,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사세를 추측할 수 있는 많은 석부재가 발굴되어 인각사 경내에 쌓여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 미륵당, 산신각과

일연선사를 모시는 전각,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普覺國師塔─碑)가 있다.

이 탑비는 1153년(의종 7)에서 1155년 사이에

사승(寺僧) 죽허(竹虛)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글자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그 밖에도 극락전 앞에는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고,

정조탑 옆에는 높이 1.5m의 석불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으며,

절 입구 좌측에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극락전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서향을 향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두고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스님이 축원법문을 올리는 중이라 법당 정면을 담지 못했다.

인각사는 비구니 사찰답게 법당도 정갈하게 꾸며져 있다.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軍威 麟角寺 三層石塔)은

2002년 8월 19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양식은 전형적인 신라탑의 양식을 이어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다.

 

지표면 위에 노출된 상대기단의 갑석은 2매 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툼한 부채꼴 모양의 받침에 얕은 사각형의 받침이

겹쳐져 있는 이중의 탑신 괴임대가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옥신의 체감비율과 어울리게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전체가 4단으로 되어 있으며,

모서리의 선은 많이 둥글려져 있다.

 

3층의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앙화(仰花)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그 위에 보륜(寶輪)이 얹혀 있는데

앙화와 마찬가지로 문양이 많이 마멸되어 있다.

 

보륜의 위에는 불꽃 모양의 장식물이 이어져 있는데,

상륜부의 다른 부재에 비해서 석질이 달라 원래 탑재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단의 우주 하단에 있는 재목을 서로 이을 때 쓰는 나뭇조각 자국이나

갑석과 면석이 이완되면서 보이는 적심석을 볼 때

한번 해체되었다가 조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탑의 양식은 전형적인 신라탑 양식을 이어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가 남아 있어 양식과 구조연구에 중요하다.

또한, 이 탑의 제1 탑신석이 제2 탑신석보다 높이의 비례가 크고,

옥개석의 옥게 받침이 4단인 점 등을 볼 때

고려전기의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되어

나말선초 석탑의 편년 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다.

노주석

삼층석탑과 극락전 사이에 있는 이 노주석(露柱石)은

노주석인지 석등인지 불분명하다.

노주석은 고려 시대 이전으로 조성된 것은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고,

문경 대승사나 금룡사에서 보듯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노주석을 보면 상대석이 방형(方形)이다.

금산사의 노주석은 방형인지 원당형인지 불분명한 것도 있지만

간주석이 너무 짧고 상대석이 두툼하다.

인각사의 노주석이 석등이라면 이는 화사석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데,

부조된 솜씨가 상당히 세밀하여

이는 앞의 삼층석탑과 다른 후대의 작품으로 사료된다.

 

산신각

법당이 없는 단출한 작은 2층 누각 형태로

전각 안에는 산신을 모시고 있고,

뒤편에는 산신과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진 탱화가 조성되어 있다.

 

미륵당

@석조여래좌상

허름한 전각 안에 석불좌상과 목조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고

미륵당 안에는 비닐로 덮인 많은 석주 불상들이

후일 온전한 전각이 조성되기를 대기하고 있다.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軍威 麟角寺 彌勒堂 石佛坐像)은

얼굴과 손발이 모두 멸실되어 있다.

2002년 8월 19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426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눈을 반쯤 뜨고 명상에 잠긴 듯하며,

풍만한 얼굴엔 자비로움이 가득하다.

코는 파손되어 원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균형 있게 처리되어 있다.

입술은 작고 도톰하게 새겨 풍만한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목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는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어깨가 마멸되어 있긴 하지만, 세심하게 새긴 옷 주름으로 보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우견편단으로 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두 팔과 무릎이 깨어져 없어졌는데, 무릎은 불신에 비교해 높은 편이나

안정된 비례감은 잃지 않았다. 손 모양은 왼손의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조형상 촉지인(觸地印)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부피감 있는 얼굴, 평행계단식 옷 주름선,

양감 있는 가슴 표현 등의 조각 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 시대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불상은 인각사의 창건 연대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목조약사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우측에 봉안된 목조 약사여래좌상 역시 균열이 심하다.

조성 시기 등 안내서가 없어 알 수 없지만,

타원형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에는 나발 위에

완만한 육계가 부조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가 부조되어 있고,

법의는 U자형 통견이며, 양 무릎을 덮고 있으며, 양손으로 약함을 들고 있다.

조각기법으로 보아 신라말 고려 초기 양상을 조합한

고려 후기 작품이 아닌가 사료해 본다.

 

보각국사탑비

현존하는 보각국사비는 점판암(粘板岩)의 석재로 손상이 심하다.

비신의 높이는 1.8m, 너비 1.06m, 자경 약 1.8㎝로 행서이다.

자체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글자는 비신의 전면에 150여 자가 남았고,

비음(碑陰: 비의 뒷면)에는 100여 자가 현존한다.

 

비문은 월정사 소장의 사본에 의하여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근래 탁본의 전문이 발견되었다.

비문에 의하여 비를 세운 시기는 1295년(충렬왕 21)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부도의 건립 역시 그가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로 짐작된다.

이러한 시기는 부도 자체의 양식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군위인각사석불좌상(軍威麟角寺石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 인각사 보각국사탑 옆에 봉안된 이 석불좌상은

고려전기(10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불좌상은 높이가 153㎝로, 광배와 불상이 한 돌로 조성되어 있으나,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어 앞에서 보면 마치 단독불상처럼 보인다.

 

신체표현이나 의습선의 표현, 상호 표현 등 모든 면에서 부드럽게 처리하였다.

머리의 육계는 크고 높지만 거의 머리 크기와 비슷하며,

큼직한 나발이 머리 전체에 조각되었다.

상호는 전체적으로 통통하고 둥글둥글한 윤곽에

눈코입이 작게 표현되었으며, 특히 입이 작고 양 끝이 움푹하게 들어가 있어서

뺨이 더 통통하게 보인다. 양 귓불은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아 있다.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과 선정인의 수인을 취했는데,

특히 선정인의 수인 위에 작은 지물이 있는 것으로 보여

약사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불의(佛衣)는 양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이며,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진 대의가 배 앞에서 접혔다가

오른손 옆으로 내려진 것으로 보아 이중착의법일 가능성이 크다.

옷 주름이 대의 전체에 골고루 표현되었으며,

의습선은 선각으로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의습선은 영양 연당동 석불좌상(889년)이나

경북대학교 소장 비로자나불상, 홍천 내촌면 물걸리 석불좌상 등과 유사하다.

가슴 앞에는 승각기와 띠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파손되어 정확한 형태와 세부 조각은 알 수 없으나,

주형 거신 광배의 형태이다.

 

불상 신체의 양감이 표현되지 않은 점, 경직된 어깨,

높고 짧은 양 무릎, 옷 전체에 같은 간격으로 음각된 의습선 등으로 보아

양 무릎에 의습선을 표현하지 않거나

신체의 양감이 풍부하게 표현된 9세기의 불상과는 다르며,

또한 상호와 신체 등이 큼직하게 표현되기 시작한 고려의 불상과도 달라

10세기 전의 불상과는 다른 여러 특징을 지니고 있어

10세기 이후의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각사 보각국사탑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선사의 승탑으로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승탑의 높이 242cm. 보각(普覺)은 충렬왕15년(1289년)에 일연선사에 내린 시호로,

탑명은 정조(靜照)이다. 일연선사의 생몰연대는

희종 2년(1206년)~충렬왕 15년(1289년) 이며,

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이다.

 

본래 이 탑과 비는 인각사로부터 약 1㎞ 거리의

마을 뒷산에 위치하는 이른바 부도골[浮屠谷]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는 민묘(民墓)가 설치되어 있으나,

원래 한 말에 일인의 사리 절취로 인하여 부도가 무너졌다고 전한다.

부도는 그 뒤 1962년 면사무소에서 이전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부도는 자연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8각의 하대석(下臺石)을 놓았는데,

상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중앙에는 8각의 낮은 굄을 나타냈으며,

이 굄과 연이어서 작은 연화(蓮花)를 조각하였다.

 

그 위의 중석 역시 8각이며, 각 면에는 넓은 구획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동물상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상대석 역시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그 밑에서부터 단조롭고

소박한 연화문을 선각으로 나타냈다. 8각의 탑신 전면 광각(框郭) 내에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는

자경 6㎝의 해서로 탑명을 새겼다.

 

후면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졌으며, 나머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화좌 위의 보살입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사리공은 탑신 상면에 마련되었고, 8각 옥개석(屋蓋石) 밑에는

낮은 받침이 있으며, 두꺼운 추녀 밑은 전각(轉角)에 이르러

위로 느리게 반전(反轉)되었다.

 

낙수면(落水面)은 급한 편이며,

여덟 가닥의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이 내려온 끝부분에

단조로운 귀꽃을 조각하였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개(寶蓋)가 있고,

그 위에 앙련(仰蓮)과 화염문(火焰文)을 새긴 보주(寶珠)가 1석으로 마련되었다.

부도의 형식은 팔각원당(八角圓堂)의 기본형식을 취하였으나,

조각 수법과 함께 형태가 둔중하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시대 이래의 8각 원당 형을 따르고 있지만,

형태나 조각 수법이 둔중한 느낌을 준다.

 

또 비문에 의하면 1295년(충렬왕 21)에 비가 건립되었다고 하므로

이 부도는 일연이 입적한 1289~9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설명은 백과사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지만

마모가 심해 부조의 양태를 판별하기 어렵다)

석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