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

나그네 현림 2020. 2. 15. 00:43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

 

탑 명: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조성한 시대: 조선 세조 13(1467)

탑의 높이: 12m

문화재지정: 국보 제2

소재: 대리석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공원

 

 

 

남대문이 국보 제1호라는 사실은 많이들 알고 있지만,

종로에 있는 탑골공원의 원각사지십층석탑이

국보 제2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석탑은 세조 13(1467)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는 12m, 3층 기단에 10층의 탑신으로

화강암이 아닌 전체를 대리석으로 목조건축물의 형태를 모방하여 조성된 조선 시대 유일한 석탑이다.

이 석탑은 10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고 그 위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는데,

상부의 3층 옥개석(屋蓋石)이 오랫동안 지상에 방치되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2000년에는 표면 훼손이 심각해 현재는 유리 보호각을 씌워 놓은 상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원각사의 창건 동기를 살펴보면

 원각사 창건의 의도가 사리봉안에 있음이 강조되고 있어

 당시 탑의 건립이 특히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조선 시대의 석탑으로는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 데 비해 대리석으로만 조성된 것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1348년 개성근교에서 건립된

고려 시대의 탑인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쓰인 재료와 탑의 형태가 매우 비슷하여

이를 본떠 1465(세조 11) 원각사 창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세조 13(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20101227일 문화재청은 종전 명칭인 '원각사지십층석탑'

행정 지역 명칭 표기 부기 및 한글맞춤법(띄어쓰기)을 적용하여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변경하였다.

 

 

기단부 3층과 탑신 3층까지 4면 돌출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졌고,

4층 탑신부터 정사각형 평면으로 바뀌었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3층으로 되어있고,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평면은 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층마다 각 면석에는 기단부의 면석에는

모서리에 상다리 모양의 장식적인 원기둥을 세우고

여러 가지 조각으로 화사하게 장식되었는데,

 

 

 

 

1층에는 각 면에 용(), 혹은 사자(獅子)와 모란(牡丹연화문(蓮華文)이 조식 되고,


 

2층에는 각종의 인물·조수(鳥獸초목·궁전을 표현하였으며,


 

3층에는 많은 나한과 선인들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변상도를 나타낸 듯하다.

 

 

 

기단 갑석의 위아래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갑석 측면의 돌출부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상층기단 갑석 상단에는 난간을 장식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도록 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포계 목조건축의 지붕을 그대로 본떠 장식했다.

1·2·3층은 평면이 기단과 같은 자형 팔작지붕으로 표현했다.

특히 3층은 겹처마로 하여 4층 이상의 단조로운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4층부터는 방형(方形)으로서 이 윗부분은 일반형 석탑의 탑신과 그 형태가 같다.

각 층의 옥신에는 하단부에 굄대를 높직하게 마련하고 측면에는 난간을 모각하였다.

 

 

 

탑신부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용을 부조한 원형의 석주를 모각하고

부처나 보살상·신장상·천인상 등을 부조했으며,


 

 

 

 

 

 

 

 

 

 

 

 

 

 

 

 

 

 

 

 1~4층의 남면까지 탑신의 돌출된 면에는 13불회의 조상을 부조하고

 명칭까지 새겨놓아 불교 신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화려한 의장이 돋보이는 이 탑은 표면의 부조들이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비교하면 평면적이지만 조선 초기의 조각 양식 연구에 중요하다.

 

 

 

각 면 중앙에 12(十二會)의 불(보살(菩薩천인상(天人像) 등을 조각하였으며,

 네 귀퉁이에는 원형의 석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층마다 팔작지붕을 하였고, 하면에 두공(枓栱)을 모각하였는데,

지붕의 기왓골 등 모두 목조건축의 옥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특히, 2층 정면의 지붕은 전각지붕과도 같고,

더욱이 3층은 이중의 지붕 모양으로 조성되어서 그 의장과 기교가 놀랍다.

이 석탑은 전면에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 석재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서 한층 더 우아한 맛이 있다.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전면에 장식된 불상의 조각 등이

고려 시대의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사용된 석재가 대리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본방 경천사지10층석탑 참조)

 

 

 

이 석탑의 소속 사원(寺院)이었던 원각사는 1465(세조 11)에 창건되었으며,

 따라서 이 석탑도 사찰 창건 당시의 건조물로 추정되고 있다.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그 수려하고도 기교적인 면이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탑파사상(塔婆史上) 손꼽히는 걸작품이라 하겠다.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원각사

탑골공원에 있었다는 원각사는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원각사를 지었을 당시 근처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여

 3년 후에 완공된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이었다.

이 절은 당우나 문루의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과 1468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하였다는 10층 석탑이 있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가 억압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교를 숭상한 몇몇 왕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되었던 불교는

 성종 때 들어와서는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연산군 대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혹하여졌다.

특히 도심 안에 있는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는 1504(연산군 10)에 시작되었지만

당장에는 철거하지 않았고,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탑골공원)에 옮겨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 인과 악사 1,000,

감독 40인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연방원(聯芳院)으로 바뀌었다.

 

 

그 후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으로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14(중종 9) 호조에서 원각사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영선에 쓸 것을 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얼마 안 가서 이 사찰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옛 원각사의 대종은 보신각으로 이관되고,

대원각사비와 이 10층 석탑만이 유일하게 현재 탑골공원에 남아

이곳이 원각사의 옛 절터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