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화성 봉림사 보물 제980호 목조아미타불좌상

나그네 현림 2019. 3. 5. 22:35


(일주문)

화성 봉림사 보물 제980호 목조아미타불좌상



필자가 다녀 본 사찰 중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좌상으로 유명한 사찰은

서울의 개운사와 수국사 그리고 서산의 문수사와 개심사다.

그런데 이들 목조 아미타불좌상의 해설을 보면 공통적으로 비교되는 것이

화성 봉림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이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조성시기가

대체로 12~13세기 안팎으로 고려 후기시대의 작으로 추정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화성은 서울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몸도 그렇고,

이런저런 연유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해가 바뀌어 이번에 봉림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사찰 안내서에 따르면 화성 봉림사(鳳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때 고구려의 침략을 불도(佛道)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절 이름은 창건 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새가

절 주위의 숲에 와서 앉았으므로 봉림사라 칭하였다고 전하며,

1621(광해군 13) 안모(安暮), 자현(慈賢)

대웅전, 망양루(望洋樓), 봉향각, 범종각 등을 중수하였다.

 

1708(숙종 34)에 중건이 있었다. 1884(고종 21) 무렵에도 중건하였으며,

1979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腹藏) 유물로 나온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을 근래에 세웠다.

1998년 삼성각을 건립하고, 1992년에는 요사를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격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설법전, 범종루, 요사채 등이 있다.

극락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이며,

내부에는 보물 제980호로 지정된 높이 87의 목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밀적금강) 

1978년 이 불상을 개금할 때 복장품에서 지정연간(至正年間, 13411367)의 묵기(墨記)가 나와

고려 말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상에서 나온 전적들은 보물 제1095호로 지정되어 현재 용주사에 소장되어 있다.



(나라연금강)


좌로부터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북방수호신 다문천왕이다.

다문천왕의 지물은 비파로 알려져 있는데 봉림사의 사천왕은 금강저를 들고 있다.


좌로부터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범종루




극락보전에서 바라 본 법종루


범종루 옆에 조성한 범종루공덕비


극락전은 범종루와 일직선 상에 위치하며 앞마다 좌측에 종무소, 우측에 설법전을 조성했다.

극락보전 앞 마당에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종무소


설법전


사리탑과 범종루


3층 사리탑

1978년 아미타불 개금시 복장유물에서 사리가 나와 이를 봉안하여 모신 탑이다.

1979년 범종루와 함께 조성했다.



<대웅전>

대웅전은 전면3, 측면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법당에는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고 있다.


봉림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아미타불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목조불좌상으로

 높이는 88.5cm이며 현재 보물 제98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78년 이 불상을 개금할 때 복장(腹藏)에서 여러 권의 사경과 함께

조성개금기 造成改金記가 발견되어 1362(공민왕 11) 이전에 조성된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임이 밝혀졌다.

복장유물로 나온 전적과 경전은 일괄 보물 제1095호로 지정되어 용주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봉림사의 목조 아미타불좌상은 1274년의 중수기를 가지고 있는 고려 1200년경 전후의 불상으로

고려 중엽 내지 후반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히는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흡사하다.

(본방 개운사 참조)



얼굴은 둥글고 살진 형으로 이목구비가 중앙으로 몰려 있으며

표정에 생동감이 줄어들고 경직되어 다소 침울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점은 차이가 있다.

 손 모양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하품중생인을 했는데

오른손은 정면으로 들어 올리고 있고, 왼손은 가슴 아래까지 올라가 있어

불국사의 아미타불좌상과, 장곡사(長谷寺) 금동약사불좌상의 비교하면

자연스러운 하품중생인 표현과 차이가 있지만,

개운사(보물 제1650), 개심사(보물제1619)의 아미타불과는 동일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런 수인은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으로 여겨지며,

고려 초기와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상과는 다소 이질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체는 풍만한 편이나 목과 상체가 넓고 각진 점이 특이하다.

대의를 걸친 모습이 문수사의 불상과 같은 형식이나 왼쪽 가슴에 보이는 승각기 치레장식과

가슴에 두른 띠와 매듭이 없는 점, 어깨의 옷주름이 좀더 번잡스러워진 점이 다르다.

 무릎에서 발목으로 향해 몰려 있는 주름이나 왼쪽 어깨와

배 앞에 몰려 있는 옷주름에서 과장된 표현과 도식화의 경향이 보인다.

이 상의 얼굴 모습, 신체비례와 자세의 변화, 조각기술의 쇠퇴에서 오는 옷주름의 형식화 경향 등은

조선시대 조각양식의 일면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협시불인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은 아미타불 조성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보살은 육환장과 보주를 들고 있고,

관음보살은 감로병을 들고 있으며 보관에 아미타불상을 하고 있다.

두 협시불은 가슴에 영락을 하고 있다.

지장보살  


관음보살 


신중탱이다, 위는 3두를 한 예적금강, 그 아래는 위태천을 도상했다.


범종



@목조아미타불복장전절일괄

  봉림사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좌상의 복장에서 나온 사경 3종과 목판본 5종의 전적으로,

화엄경을 은니로 사성한 것 중의 일부로, 고려말에 사경 신앙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자료이다.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복장전적일괄(華城 鳳林寺 木造阿彌陀佛坐像腹藏典籍一括)은 

 고려시대의 전적류로, 19919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95호로 지정되었다.





종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진본(袖珍本)금강반야바라밀경:

 1339(충숙왕 복위 8) 강금강(姜金剛) 등에 의하여 간행된

소자(小字)금강경목판본으로 당나라 구마라집(鳩魔羅什)이 한역한 금강경이다.

권머리에는 신중상(神衆像)과 설법상(說法像금강경계청(金剛經啓請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금강상(八金剛像사보살상(四菩薩像발원문(發願文운하범(云何梵)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지기(誌記)와 범자(梵字)로 된 불정심다라니 등

6개의 짤막한 다라니와 여의인(如意印) 10개의 부()가 있다.

마지막에 강금강의 인출기(印出記)가 붙어 있다.

 

이 판본은 호신 또는 독송용으로 판각한 수진본이다.

권말의 기록에 의하면, 각원(覺圓)이 고연(古燕)에서 우연히 본국의 승려 홍준(洪准)이 쓴

소자본 금강경을 구하여 비구 달현(達玄영흥(永興이기(李夔전대동(田大同) 등과 함께 발원하여

1311(충선왕 3)에 판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붙어 있는 인출기를 보면,

1339년 원나라에서 활약하던 강금강이 시주하여 찍어 냈음을 알 수 있다.

 

이 수진본은 한동안 가지고 다니다가 복장된 듯 일부 해어진 곳도 보이고 있으나,

인출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판각된 지 28년 후에 찍었다고 하였으나 글자에 마멸이 없고,

인쇄상태가 양호하다. 개금기(改金記)에 의하면 1362년 개금할 때 복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권48:

이 사경은 감지에 은니로 쓴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한역한 80권으로 구성된 화엄경가운데 한 권이다.

사성기와 변상도가 없고 표지의 장식이나 본문 글씨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전체 품격이 고려사경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경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고려 말기의 사경으로 추정된다.



백지묵서묘법연화경:

 백지에 먹으로 쓴 후진(後秦)의 구마라집이 한역한 7권으로 구성된 법화경인데,

그 중 둘째 권이 전래된 것이다. 이 사경은 후반부가 탈락되어 있고

사성기가 없어 확실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감지에 금은으로 묘사된 표지의 장식과 본문의 글씨로 보아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지묵서범망경:

양질의 두꺼운 백지에 먹으로 쓴 후진의 구라마집이 한역한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10의 하이다.

권말에 사성기는 없고, 다만 화주혜상묘원최신성시주경화택주이씨(化主惠尙妙圓崔信誠施主慶和宅主李氏)’

 사경에 참여한 화주와 시주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생존시기가 현재로서는 미상이므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남아 있는 뒷표지의 장식과 본문 글씨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과주묘법연화경합부(科注妙法蓮華經合部):

명나라 초기에 간행된 과주(科注: 전체 내용을 과로 나누어 각주한 것)가 붙은 법화경목판본이다.

이 판본은 후진의 구라마집이 한역한 법화경7권을 본문 위에다

 본문의 내용을 알기 쉽게 과주한 것을 붙이고, 양질의 중국 종이인 모변지(毛邊紙)를 사용하여

앞뒤로 인쇄하여 한책으로 간행한 것이어서 휴대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소자(小字)금강반야바라밀경:

1228(고종 15) 목판으로 찍은 낱장본의 금강경이다.

 마지막 장에는 무의자(無衣子)의 발문이 붙어 있다.

무의자는 고려시대 수선사(修禪社) 2세 국사인 혜심(慧諶)이다.  

발문에 의하면 금강경·법화 경보문품·화엄행원품등은

일반인이 바로 본심을 깨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단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가 가장 요긴하기 때문에 도인 열가(悅可)에게 쓰게 하고

시랑 이굉(李紘)과 삼중대사 문광(文光)이 힘을 합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판본은 가지고 다니면서 독송하기 위한 수진본이지만,

제책하지 않고 낱장으로 불복에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둘째 장이 결실되고 4장이 남아 있다.

 

소자범총지집일부(小字梵摠持集一部):

 범어로 된 총지집으로 목판에서 찍은 낱장이다. 낱장 한 장에 내용은 두 장씩 찍어 내어 배열하였는데,

현재 제3장과 제4장이 결실되어 있고 낱장 5(내용 10)이 남아 있다.

 간행기록은 없으나 전체 인쇄조건으로 보아 무의자의 발문이 있는

소자 금강경낱장과 동일한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자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목판에서 찍어 낸 낱장(현재 4, 둘째 장은 결실)이다. 권말에는 발문이 있는데,

 먹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간행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성수만세 청하상국복수무강(聖壽萬歲 淸河相國福壽無疆)’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청하상국은 고려 고종 때의 권신인 최우(崔瑀)의 관직이므로,

이 판본은 최우의 수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된 것이다.

위의 낱장본들과 인쇄조건이 비슷하므로 고려 고종 때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도 화성군 용주사에 보관되어 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삼성각


삼성각에서 바라본 전경


극락보전 뒤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