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김천 황악산 직지사(2/2)

나그네 현림 2018. 9. 23. 12:50




김천 황악산 직지사(2/2)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민중 시인이자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金炳淵)

혼란한 세상을 유람하며 권력가를 풍자하는 무수한 시문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직지사를 찾았다가 승려들로부터 박대를 당한 후 쓴 시가 직지발치승(直指拔齒僧)이다.

수모를 당한 김병연은 주지와 글짓기 내기를 청하여 이기는 사람이

지는 사람의 이를 뽑기로 했는데, 이 시로 인해 주지가 이를 뽑혔다고 전한다.

 

금오설적오두백(金烏雪積烏頭白)[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황악화개학두홍(黃岳花開鶴頭紅)[황악이라 했는데 꽃이 피어 학의 머리가 붉구나]

추풍령상춘화괴(秋風嶺上春花怪)[추풍령이라 했는데 봄꽃이 피어 괴이하구나]

직지유중로곡하(直指由中路曲何)[직지라 했는데 꼬부랑길이 웬 말이냐]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명부전

명부전(冥府殿)931(태조 14)에 능여조사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668(현종 9) 팔상전으로 중건되었다가

명부전으로 개액하고 시왕상을 봉안했다. 정면 3, 측면 3칸으로, 83규모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시왕전(十王殿), 지장전(地藏殿)으로도 불린다.

명부전 내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무독귀왕이 협시해 있고,

진관대왕·초강대왕·송제대왕·오관대왕·염라대왕·변성대왕·태산대왕·평등대왕·

도시대왕·전륜대왕 등 시왕이 나열해 있다.



명부전에서 말하는 명부는 도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인간이 죽어서 영혼이 심판받는 곳을 명부라 하는데,

이곳의 시왕들에게 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면 지독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명부전에 지장보살이 있는 이유는,

지장보살이 지옥에 한 명의 중생이라도 있다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로전

비로전(毘盧殿)은 고려 태조 때 능여조사(能如祖師)가 창건하였다.

 내부에는 경잠대사(景岑大師)가 경주의 옥돌로 조성한 천불상을 봉안하여

천불전(千佛殿)으로 더 많이 불린다.

임진왜란 때 일주문·천왕문과 함께 병화(兵火)를 모면한 전각으로,

그 가운데서도 불전으로는 유일하게 소실을 면하였다.

천불전 중창기에 따르면 1661(현종 2)에 중창과 개금(改金)을 하고,

1702(숙종 28)에 단청 불사가 있었다. 1899(고종 36)1939년 중수가 이루어졌고,

1976년 원래의 천불전을 서쪽으로 옮겨

조사전(祖師殿)이라 편액하고 현재의 자리에 천불전을 중건하였다.



 

비로전 내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노사나불을 모시고,

14개의 나무 계단에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에서 현재의 천 불을 신앙하는 천 불을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천 불 중 295구가 분실되었으나 1785(정조9) 다시 보완했다.



아들 낳기를 염원하는 참배자가 법당에 들어가서 참배할 때

첫눈에 바로 이 동자상이 보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천불전은 직지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불전으로,

예부터 신혼부부를 비롯해 아들 낳기를 염원하는 부녀자들이 많이 찾았던 명소이다.


윤장대는 대개 전각 앞 마당에 전각 속이나 노천에 두는데 직지사는 비로전 안에 두었다.












@약사전

약사전(藥師殿)은 주지 녹원화상이 1978년 정면 3, 측면 2, 39규모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신축하였다.

약사전 내에는 보물 제319호로 지정된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된 석조여래좌상(펌)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은 1955년 국보 제475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제319호로 다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

총 높이 161cm, 상 높이 126cm. 광배와 불신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나

사각형의 대좌가 원래 함께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머리와 큼직한 육계는 소발로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심하게 마멸되어 세부표현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원래 직지사 입구 사적비 부근에 있었는데,

1975년 약사전을 신축하면서 약사전으로 옮겼다가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불신과 광배가 화강석의 한 돌로 조성되고,

결가부좌(結跏趺坐)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에 약호(藥壺)를 든 형상이다.

 주형(舟形)의 광배 안에는 당초문(唐草紋)을 새겼고,

전신에 드리워진 법의(法衣)가 매우 화려하다.

전설에 직지사 약사불과 수도암 약광전 약사불, 금오산 약사암의 약사불이

 한 석공에 의해 조성되어 서로 마주 보고 앉았는데, 한 불상이 하품하면 같이 따라 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양루(安養樓)>

안양(安養)이란 말은 불교에서는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함을 의미하는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정토를 일컫는 말이다.

이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여러 이름이 있다.

극락 (極樂), 극락정토 (極樂淨土), 금색세계 (金色世界), 무량청정토 (無量淸淨土),

안락국 (安樂國), 안락세계 (安樂世界), 안락정토 (安樂淨土), 연화세계 (蓮花世界).

유사어로는 안양계 (安養界), 안양보국 (安養寶國), 안양세계 (安養世界), 안양정토 (安養淨土) 등이 있다.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잠시 풍경만 엿보았다.












범종각 뒤편의 풍경









@직지사사적비

직지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능여대사가 활동하여 고려 태조가 대찰로 창건하였다.

이곳에 왕희지(王羲之) 글씨를 집자한 비가 있었는데, 조선 세조 때 학조(學祖)가 중수하였고,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유실되었을 때 중창하였다.

직지사사적비는 1681(숙종 7)에 조종저(趙宗著)가 짓고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쓰고 낭원군(朗原君)이 전액을 썼다.

1681년에 비를 새기다 완성하지 못한 것을 1741년에 다시 완성하여 건립하였다.

직지사 사적비는 직지사 일주문에 도달하기 전 근처 초입 길가 언덕에 있으며, 주위에는 돌담이 둘려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에 세운 비로서, 서체는 해서체이다.

총 높이는 419이다. 몸돌 높이는 239.2, 가로 119.9, 폭은 30.3이다.

 용머리 높이는 115.2, 거북 받침돌 높이는 108.1이다.

사적비 옆의 비가 직지사 추담대사비 (直指寺秋潭大師碑)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추담대사 관징(琯澄)[1582~1685]13세에 출가하여

회암(晦庵), 낙암(洛岩), 환성(喚醒), 쌍운(雙運), 대적(大寂) 등 당대 명승이라 불리던

 여러 승려를 찾아 배우고 끝내 운암(雲岩)의 법을 이었다.

조선 후기에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법을 찾던 수행자들의 일면을 뚜렷이 보여주는 행적이다.

1613(광해군 5) 학문을 이루고 강석(講席)을 열었으며,

항상 문하에서 수백 인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았다.

불교 경전뿐 아니라 외전(外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시문을 잘하기로 당대의 승려 중 으뜸이었다.

명적암(明寂庵)[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에 있던 절]에서 입적하였다.


이 비의 서체는 해서체이다.

 총 높이는 195이고 몸돌 높이는 131.8, 가로 56.8, 폭은 10.4이다.

용머리 높이는 44.5, 받침돌 높이는 12.7이다.


비문의 내용은 간략한데, 이 역시 이 시기의 추세이다.

입적한 자리인 명적암에 먼저 영각(影閣)을 세우고 추모하다 비를 만들어 세웠음을 밝히고 있어,

직지사 추담대사비는 이 시기 선사 추모의 경향을 알게 해 준다.

 1787(정조 11)에 강항(姜杭)이 짓고 강세백(姜世白)이 전액을 썼다.

비문의 내용이 간략하여 전면의 비 구성이 짜임새가 부족한 편이다.

후면에는 제자, 손제자, 상좌로 구분된 제자들과 관련 인사들을 성글게 적어 넣었다.




직지사 입구에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

뒤편에 붙은 <覺城林泉高致(각성임천고치)>라는 수려한 필체의 편액이 걸려 있다.

두 편액 모두 서예 대가인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은 동국의 제일가는 황악산의 문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데 평이하여 큰 무리가 없지만 <覺城林泉高致>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불광대사전>에 의하면

<覺城> 覺悟(각오)한 경내에는 일체의 衆惑(중혹) 이 들지 못함으로 에 비유한 것이며,

또한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都城(도성)으로 마갈다국의 가야성(伽耶城 gaya)을 뜻한다.  


<林泉高致)라는 말은 북송(北宋 : 960~1127)시대 산수화의 대가인 곽희와

그의 아들 곽사가 함께 지은 화론집인 임천고치 林泉高致/1070에서 따온 것이다.  

임천고치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에 따른 나무의 변화와

아침·점심·저녁때 안개의 모습은 물론 시방식(視方式)에 있어서의

 앙시(仰視), 부감시(俯瞰視), 수평시(水平視)의 투시법을 통하여

산수화의 기본이 되는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의 삼원법(三遠法)을 제시하고 있다.

심원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것처럼 그리는 방법으로,

 겹겹이 쌓인 산이나 골짜기를 표현할 때 적합하다.

자연의 깊이, 깊숙한 공간의 느낌, 부감시적 표현을 느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를 불교의 수행으로 비유한다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면

한 올의 티끌만큼 의혹이나 의심도 일어나지 않게 철저하게 모두 털어버려야 한다는

신심명(信心銘)毫釐有差(호리유차) 天地懸隔(천지현격)이란 말의 의미가 된다.

 

예술에는 시화일치(詩畵一致), 즉 시와 그림이 하나의 예술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추앙받는 당대(唐代)의 시인이자 문인화가인 왕유(王維)의 시에 관하여

 소식(蘇軾)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힐[摩詰: 왕유]의 시를 음미하면 그 가운데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 가운데 시가 있다.”

이 말은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라는 구절로 중국화론에서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곽희(郭熙)의 가르침을 찬술해 놓은 곽사(郭思)임천고치(林泉高致)(1070년경)에는

 시는 형상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형상이 있는 시라고 하였다.

 즉 유성화(有聲畵), 무성시(無聲詩) 역시 소식의 위 구절과 같은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 불교적으로 해석으로 한다면

곧 반야경에서 말하는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의 뜻과 다르지 않다.

 

그럼으로 <覺城林泉高致>라는 편액의 글은 필자 나름대로 의역하자면

바른 깨달음(正覺)의 경지는 일체의 의혹이 일어나지 않은 부처의 경지(覺城)임으로,

 궁극적인 수행을 통해서 득()하라(林泉高致)는 경귀를 담은 편액이 아닌가 하고 새겨본다.



직지사 앞 공원의 조형물


매표소 입구 한 켠에 자리한 김천 출신 시조시인 백수 (白水) 정완영 선생이

직지사를 노래한 시비(詩碑)로 산문 투어를 마감한다.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

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

오늘은 외줄기 길을 落葉(낙엽)마저 묻혔고나

뻐꾸기 너무 울어싸 절터가 무겁더니

꽃이며 잎이며 다 지고 산날이 적막해 좋아라

허전한 먹물 長衫(장삼)을 입고 숲을 거닐자

 

오가는 輪廻(윤회)의 길에 僧俗(승속)이 무에 다르랴만

沙門(사문)은 대답이 없고 行者(행자)도 말 잃었는데  

높은 산 외론 마루에 起居(기거)하는 흰구름

인경은 울지 않아도 山岳(산악)만한 둘레이고

은혜는 뵙지 않아도 달만큼을 둥그느니

문득 온 산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노메라

~直指寺韻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