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김천 황악산 직지사(1/2)

나그네 현림 2018. 9. 22. 19:49



김천 황악산 직지사(1/2)

 

@김천 황악산(黃嶽山/해발 1.111m) 직지사(直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신라 시대인 418(눌지마립간 2) 아도화상(我道和尙)

선산 도리사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성주산문의 조사 무염대사가 머물렀던 심묘사에 부속된 절로

남종선의 가르침인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표방한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려 시대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이 절을 세울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다고 해서 직지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645(선덕여왕 14) 자장율사가 중창한 이래로 930(경순왕 4),

936(태조 19)에 천묵대사(天默大師)와 능여대사가 각각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출가하여 득도한 절로도 유명하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1735 중건)을 비롯하여 천 불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1661 창건)

약사전·극락전·응진전·명부전·사명각 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동 6각 사리함(국보 제208), 석조약사불좌상(보물 제319),

대웅전 앞 3층 석탑 2(보물 제606), 비로 전 앞 3층 석탑(보물 제607),

대웅전 삼존불 탱화 3(보물 제670),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 등이 있다.




@일주문

사찰의 대문에 해당하는 일주문은 사적에 나타난 조계문과 같은 건물로 추정되며,

달리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고려 시대 3칸 규모로 건립된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59년 주지 녹원화상이 기와를 교체한 데 이어

1970년 축대와 단청 불사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1칸의 팔작지붕, 7.8규모이며,

현판 글씨는 조맹부(趙孟頫)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천왕문과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을 면한 문으로, 양 기둥은 천년 묵은 싸리나무와 칡으로 세웠다고 하며,

오른쪽 기둥 상부에 임진왜란 때 불에 탔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양문(大陽門)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 이는 문으로 1990년 지어졌다.

정면 3, 측면 2칸의 주심포 팔작지붕이며, 문 양쪽에 인왕이 그려져 있다.

인왕은 불법의 수호신 금강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이 벽화는 대양문의 벽에 그려진 것으로 재가불자인 부설거사의 유명한 <병쇄수현(甁碎水懸)>의 고사를 회화한 것이다.

내용은 옛 도반이었던 두 분의 스님 영희와 영조와 허공에 줄을 메달고 물병을 매달아 병을 깨트려

그간의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행 우열을 다툰 이야기로,

 두 분의 병은 깨어짐과 동시에 물이 땅으로 곧장 쏟아 내렸지만

부설거사의 병에 든 물은 병이 깨어져도 물은 쏟아지지 않고 허공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한다.

재가자의 수행이 출가자보다 높았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기적 같은 이 사실에 두 분 스님은 자기들의 수행이

 부설거사의 도력에 미치지 못함을 참회하며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때 설한 것이 <병쇄수현(甁碎水懸)이라고 한다.

 

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나타나니 뿌리와 티끌을 멀리 벗어버리고

몸에 본성의 진상이 삶과 죽음을 따라서 옮겨 흐르는 것은 병이 깨어져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진성은 본래 신통하고 영묘하여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물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네.

그대들이 두루 높은 지식 있는 이를 찾아보았고 오랫동안 총림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생과 멸을 자비심으로 돌보고 보호하며 진상을 삼고 환화를 공으로 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을 지키지 못하는가.

 다가오는 업에 자유가 없음을 증험하고자 하니 상심이 평등한가 평등하지 못한가를 알아야 한다오.

그러나 오늘날 이미 그러하지 못하니 지난날의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자는 경계는 어디로 갔다는 것이며

함께 하리라는 맹세는 아득히 멀구려.

(본방 부설거사 이야기 참조)



@금강문

금강문은 사적에 해탈문으로 나타난다.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3규모이다.

사찰을 수호하는 수문 신장인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모셔져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수미산 중턱에서 살며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이다.

임진왜란의 병화로부터 소실을 면한 건물이다. 1830(순조 30) 중수와 천왕상에 대한 채색이 있었고,

 1890(고종 27) 다시 중수가 이루어지고, 1969년 정면 3, 측면 3, 64면적의 맞배지붕으로 중창되었다.


(밀적금강과 보현보살)

금강문에는 남편을 그리워하다 죽은 한 여인의 애절한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떠돌이 승려가 경상남도 합천 땅의 마을 촌장 집에 시주를 받으려고 들렀는데

그 집의 무남독녀 딸이 승려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딸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승려를 거두었고, 승려 역시 마음에는 없지만,

여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혼인을 하여 처가살이를 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나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아내는

아들과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으리라고 믿고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목탁과 가사, 장삼을 내주었다.

이를 받아 쥔 승려는 다시 불심이 발동하여 야반도주했고,

전국을 수소문하던 아내는 남편이 김천 직지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을 업고 합천에서 여러 날을 달려 지금의 금강문 자리까지 왔으나,

결국 아들과 함께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문수보살과 나랴연금강)  


이후 매년 부인이 죽은 날이 되면 직지사 승려들이

한 사람씩 불려 나가 부인이 죽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갔다.

이에 다급해진 절에서는 부인의 원한을 위로하고자 그 자리에 사당을 지어

해마다 기일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해, 도력이 높은 고승이 직지사를 찾았다가 제사 지내는 광경을 목격하고

크게 나무라며,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을 지어 여인의 원귀를 쫓아내라고 하여

지금의 자리에 금강문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직지사는 일주문과 금강문은 지나치게 멀고

 반대로 금강문과 천왕문은 지나치게 가깝게 지어진 것이

다른 사찰과 차이가 나는데, 여인이 죽은 자리에 금강문을 짓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는 재가불자로 유명한 부설거사가 파계한 이야기와 비슷한데 후반부 전개가 많이 다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천왕문


북방다문천왕과 동방지국천왕


서방광목천왕과 남방 증장천왕


@만세루

만세루는 황악루와 함께 직지사에 있는 두 개의 누각 중 하나이다.

1800년에 소실되었으나 1978년 정면 5, 측면 3, 107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신축했다.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자 중건할 때 황악루와 만세루의 현판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웅전 앞쪽에 있으며 2층 누각인 만세루는 원래는 37간의 거대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화재로 전소되어 1978년에 신축하였다.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건물양식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만세루(萬歲樓)라고 하는 누각의 유래를 보면 중국 진()나라 때에

윤주 자사(潤州刺史) 왕공(王恭)

양쯔강(揚子江) 근처 윤주의 성벽 서남쪽에 세운 높은 만세루에서 비롯된다.

불교 전각에서의 만세루는 부처의 설법이 만세를 누린다는 뜻으로

사찰의 법회나 법당의 주요행사를 열릴 때 사용하던 누각에 붙여진 것이다.




@대웅전앞 3층 석탑

대웅전과 비로전 앞의 삼층석탑 3기는 원래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던

도천사(道天寺) 터에 흩어져 있던 석탑으로,

1974년 직지사로 옮겨 와 수리해서 2기는 대웅전 앞, 1기는 비로전 앞으로 세웠다.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1976년 보물 제606,

비로전 앞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607호로 지정되었고,

훼손된 상륜부는 1976년과 1980년에 각각 복원했다.




8개의 석주(石柱)8면의 석판(石板)으로 된 초대(礎臺) 위에

정방체의 탑신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는데,

탑의 규모가 웅장하고 전체적인 조형미가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조성한 것으로 전한다.



@대웅전

직지사 대웅전(大雄殿)은 직지사 사적을 통해 볼 때 조선 시대 정종 대까지는

 25칸의 규모로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함께 봉안하여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2(선조 35) 중창되고,

1735(영조 11) 900여 명의 시주로 170크기에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다시 중건되었다.

현재의 대웅전은 이때 중창된 모습이다.



 내부에는 대웅전 중건 당시 조성된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 등 삼존불과

1744(영조 20)에 조성된 보물 제670호인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영산회상탱화·약사회상탱화·아미타회상탱화등 세 점의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직지사 대웅전은 2008년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내부의 천장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한 화려한 단청 조각과 함께

닫집 또는 감실(監室)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모형이 있다.

이것은 세속의 왕과 출세간의 법왕인 부처의 정수리 위에 설치되는 것으로,

통상 절의 닫집이 궁궐의 것보다 훨씬 화려하다.


@삼계불탱(직지사)

직지사 대웅보전에 세폭으로 나란히 길게 걸린 석가·약사·미타의 삼불탱.

각 회상마다 보살과 제자 성중이 있으나 사천왕은 석가탱에 둘을 그리고

약사탱과 미타탱에 하나씩 나누어 배치하였다.


(석가모니불)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1744(영조 20) 비단에 그려진 세 폭의 불화로

 세관(世冠)을 비롯한 화승 16명이 그렸다.

중앙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범천, 제석천, 십대 제자를 배치했다.

왼쪽에는 약합을 받쳐 든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주위에 일광보살·월광보살 등 8보살과 사천왕 및 12 신장이 에워싸고 있다.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대세지보살 등 여러 보살과 신장들이 호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안정감이 있고

비범한 묘사와 정교한 장식이 생동감이 있어 1980년 보물 제670호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영산회상도 세로 600cm, 가로 300cm.

사불회도와 아미타불회도 각각 세로 610cm, 가로 240cm.

대웅전에 모셔진 약사불·석가모니·아미타불상의 후벽에 걸려 있는 3폭의 탱화로 중앙에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그 좌우로 약사불회도(藥師佛會圖아미타불회도(阿彌陀佛會圖)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1774(영조 20)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삼불탱화는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아미타불·약사불의 삼신불을 배치하고,

대광명전에는 비로자나·노사나·석가불의 삼신불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먼저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하는 장면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비롯한 8대 보살, 10대 제자

그리고 이들을 지키는 사천왕과 팔부중의 천부 신장상이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군도(群圖) 형식을 이루고 있다.




(약사여래) 

약사불회도는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8대 보살과 범천, 제석천이 겹겹이 서 있으며

그 아래쪽으로는 협시보살인 일광·월광 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본존불 위로 10대 제자 이외에 약사불의 권속인 십이신장(十二神將)이 표현되어 있어

다른 탱화보다 훨씬 복잡한 구도를 보여준다.




(아미타불) 

아미타불회도는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나타낸 그림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하여 8대 보살이 화면을 빽빽이 메우고 있으며,

 명부의 구제자인 지장보살이 표현된 것이 특이하다.

3폭의 불화는 거의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본존불 중에서 석가모니만 법의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걸치고 그 외에는 모두 통견(通肩)으로 입었다.

또한, 머리 위에 장식된 2개의 계주(髻珠), 작고 조그마한 이목구비의 처리,

광배 안에 표현된 물결무늬, 법의의 장식문양 등에서는

조선 후기 불화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형식의 삼불회탱화로는 쌍계사 삼불회탱화(1781)와 보경사 삼불회탱화(1778)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보경사 탱화는 1폭에 삼불이 그려졌지만, 배치와 구도는 군도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성촤각






포대화상


육화당


범종각



@청풍료

청풍료는 1971년 주지 녹원에 의하여 신축되었는데, 형태는 팔작지붕이면서 귀틀을 낸 ㄱ자형이다.

본래는 7칸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 측면 5칸의 금단청 건물로서 크기는 총 92.76평이다.

이 건물은 현재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청풍료의 문이 닫혀져 있어 안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밖의 조형물만 담았다.








@관음전

관음전(觀音殿)은 원통전(圓通殿) 또는 대비전(大悲殿)이라고도 불린다.

1974년 주지 녹원화상(綠園和尙)이 정면 3, 측면 3칸의 47규모로 중창했다.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불전이다.





배롱나무가 제철을 맞은 모양이다. 불행이도 느닷없이 비가 뿌리기 시작하여 서둘러 몇캇을 잡았다. 






@창건주로 알려진 아도화상에 대한 소고

구미 도리사의 일주문을 보면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라고 되어 있듯 직지사는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란 편액이 걸린 문이 우뚝 서 있다.

두 사찰의 공통점은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아도화상을 창건주라고 안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아도화상의 실체에 대한 3가지 다른 기록이 나온다.

아도화상은 아도(阿道),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불리는데

첫 번째는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때인 고구려 소수림왕 2(372)2년 후인

소수림왕 4(374)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불교를 전한 승려로서의 기록이다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四年 僧阿道來”].

이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국적 불명의 승려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승려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

 소지 마립간(재위 479~500) 때 시자(侍者) 3명을 데리고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머무르다가 죽었다.

이 두 번째 인물과 첫 번째 인물이 동일인인지 아니면 동명이인(同名異人) 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두 번째의 아도가 신라에 전한 불교는 이후 법흥왕(재위: 514-540)

이차돈이 순교하여 이적을 보임으로써 널리 퍼지게 된다.

그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동고승전에 나와 있다.

 

세 번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 때 위()에 가서 아버지 굴마(堀摩)를 찾아뵙고,

 19세 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의 명을 받들어

미추왕 2(263)에 신라 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했다는 주인공이다.

아도화상은 그 후 3년 동안 일선현(一善縣, 善山)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있었으나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준 공으로 그때부터 불교의 전도를 허가받고 흥륜사(興輪寺)를 지었다.

미추왕이 죽은 후 사람들의 미움을 사 다시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앉아 죽었다.

 이 인물은 행적이 유사한 묵호자(墨胡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하다.

 


@묵호자(墨胡子)는 아도(阿道)와 함께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로 나오며,

혹은 흑호자(黑胡子)라고도 하는데, 묵호자나 흑호자는 승려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의 외모에서 기인한 이름으로 보인다. 우리말로 묵호자를 옮겨보면, ‘얼굴이 검은 외래인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묵호자는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신라의 일선군(一善郡)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묵호자는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의 집에 있는 토굴에서 기거하였다는 등

 아도화상과 같은 행적이 기록이 되어 있어 동명이인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2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