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남해 금산(1/2) 운무 속으로 거닐다

나그네 현림 2018. 8. 28. 00:46




남해 금산(1/2) 운무 속으로 거닐다


연일 35~36도를 오르내리는 찜통 날씨다.

이런 불볕더위 날씨에 산행을 한다는 것은 어쩜 우둔한 행동이 아닐까마는

년 중 하기휴가가 아니면 4~5일 긴 휴일을 보낼 수 없는 실정이다 보니

다소 무모하고 어리석지만, 남해 금산산행을 계획했다.

그저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면 되지 않겠냐는 얄팍한 속임수로 마음을 위로하면서.

 

남해금강(南海錦江)으로 불리는 남해의 금산(錦山)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에 속하며 해발 681m,

경상남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이라는 이름은 원래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기도처로서 보광산(普光山)이라 하였는데,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기 전에 이 산에서 수도하면서

기원한 결과 그 이상을 달성하여 왕좌에 오르게 되자 은혜를 갚기 위하여

비단 <()> 자를 써서 <普光山(보광산)에서

<錦山(금산)으로 바꿔 부르게 된 데서 지금의 금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남해의 금산이 매력적인 것은 한려해상국립공원 중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중생대 퇴적암이 빚어낸 금산삼십팔경(錦山三十八景)이란 기암괴석과

우리나라 삼대 해수관음상 중 하나인 보리암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금산을 찾는 사람은 당연히 보리암이 트래드마크이지만

이번 남해 금산여행을 정하게 된 것은 무더운 날씨지만

금산 38경의 기암괴석 중 진시황의 아들인 부소가 유배되어 머물었다는

부소암(扶蘇庵)의 신비한 바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산행의 들머리는 금산탐방지원센터를 시작으로 쌍홍문, 보리암 그리고 정상으로,

정상에서 부소암을 거처 상사암에서 쌍홍문을 지나 원점 회귀하는 코스였다.

금산 기행은 2부로 나누어 포스팅한다.

금산의 38경은  예견치 못한 지독한 운무(雲霧)가 산행 내내 시야를 가려

부소암을 비롯하여 금산이 자랑하는 경관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금산탐방 지원센터 바로 가기 전에 서복상이 세워져 있고,

그 벽 좌측에 이상한 도형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 도형은 금산 상주리석각의 암각문을 모방한 것이다.

남해 금산 상주리 석각은 금산 들머리를 두모계곡으로 잡으면

금산을 오르는 길에 거북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그 거북바위에 서복이 다녀갔다는 내용을 암각한 글이다.



흔한 암각문이 아니기에 오세창 선생의 아버지인 오경석이란 분이

이 암각의 탁본을 1860년에 중국으로 가져가 금석학 전문가에게 감식을 의뢰한 결과

 서불과차(徐市過此,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서불의 巿는 앞치마 불, 무성할 불이란 뜻이고, 혼동하기 쉬운 ()5획인데, 巿()자는 4획이다.

 

서복은 시황 28(기원전 219)에 진시황제의 허가를 받아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불로초 찾기에 나섰지만, 첫 출항은 실패했다.

전설에 따르면 서불은 그 후 2차 대규모 선단을 거느리고 출항했는데,

 남해의 영악인 보타산과 지금의 금산 산하 앵강만의 포구인 벽련포와 두모포에 기착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수년간 불로초를 찾다가

당시 상륙한 지점에 암각문을 새긴 후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고 한다.




남해탐방지원센타. 주차장은 탐방지원센타 바로 아래 도로 건너편에 있다.


등산코스는 금산탐방지원에서 쌍홍문을 지나 보리암,

 그리고 정상을 지나 단군성전, 부소암, 상사암, 좌선대  채석봉 쌍용문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다.




도선바위 샘터,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40여분이 넘게 걸렸다.

햇빛은 없었으나 무더운 날씨에 설상가상으로 모기의 극성이 지독했다.









쌍홍문에 올라서면서부터 짙은 운무가 시야를 가린다.

전날은 무덥기는 했지만 날이 맑아 금산의 운무는 전여 고려하지 않았는데.. 


쌍홍문은 글자 그대로 풀어본다면 쌍무지개가 뜨는 문이라는 뜻인데

2부에서 포스팅 될 부소암의 바위가 마치 사람의 뇌를 닯듯이

쌍홍문은 사람의  해골과 같은 양상이다.






































쌍홍문에서 100m 정도 오르면 바로 보리암의 3층석탑이 있다.



@남해 보리암 전삼층석탑(菩提庵前三層石塔)

탑의 높이는 2.3m. 고려 시대의 삼층석탑으로, 1974216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683(신문왕 3) 원효(元曉)의 금산개산(錦山開山)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인 허태후(許太后)

인도의 월지국(月之國)에서 가져온 사리로 원효가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탑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는데,

() 하성기단(下成基壇)은 단일석(單一石)으로 되어 2()의 안상이 새겨지고

 옥개석의 처마 받침은 3단으로 되었다.

단층 기단(基壇) 위에 형성한 높이 1.65m의 우아한 탑신(塔身)에는

 층마다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 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아래층보다 폭이 크게 줄었다.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직선을 유지하다 네 귀퉁이로 갈수록 두툼해지면서 위로 솟았다.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구슬 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허태후(김수로의 왕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과 3단의 지붕돌 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해수관세음보살상(海水觀世音菩薩像)

보리암에서 가장 기()가 강한 곳으로 알려진 해수관세음보살상은

1991년 한 기업가의 원력으로 세워졌다.

당시 지형적 영향으로 육로로 운반할 수 없었던 해수관세음보살상은 헬기를 이용하여 탑재에 안치했다고 한다.

좌대는 연꽃문양으로 하좌대와 상좌대로 이루어져 서로 마주 보게 포개져 있다.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다.

의습은 양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으며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흘러내린 옷깃은 그 끝이 살짝 들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이다.




우리나라 3대 해수 관음 도량 중 하나로 알려진 남해 보리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683(신문왕 3)에 원효(元曉)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보리암은 고대로부터 유래가 깊어 고대의 가락국 김수로왕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루었다고 하며

왕의 칠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長有國師) 옥보선인(玉寶仙人)을 따라 출가하여

 남해 낙가산 금산(錦山) 보리암에서 수도하다가 다시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연 것을 감사하는 뜻에서 금산이라 하였고,

 1660(현종 1)에는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改額)하였다.

 

그 뒤 1901년에 낙서(樂西)와 신욱(信昱)이 중수하였고,

1954년에 동파(東波)가 중수하였으며, 1969년에는 주지 양소황(梁素滉)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왼쪽에는 남순동자(南旬童子), 오른쪽에는 해상 용왕을 거느리고 있는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씨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의 양식을 보여 신라석탑이라 부르고 있으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감정되고 있다. 보리암 앞 바위 끝에 세운 높이 165의 이 탑은

 상륜부에 보주(寶珠)만 놓여 있다. 이 밖에도 보리암 주위에는 원효가 좌선하였다는 좌선대를 비롯하여

 쌍홍문(雙虹門) 38경의 경승지가 있다.



범종각이다. 운무가 그칠줄을 모른다.




예성당


보광전

@보리암 보광전(菩提庵 普光殿)은 정면 5, 측면 3칸의 목조건물이다.

보리암의 주법당으로 대웅전 역할을 하는 보광전은 신라 신문왕 3(683) 초창이래

여러 번의 중건 중수를 거쳤으며 현 보광전은 1968에 중건하고, 2000에 중수하였다.

보광전에 모신 주불은 서천축 아유타국 허공주가 모시고 왔다는

관세음보살(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 용왕) 삼존상(三尊像)이며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2015115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575호로 지정되었다.

좌고(坐高:앉은 높이)46cm, 무릎 폭은 23cm에 불과한 작은 불감이다.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

남해 보리암 보광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南海 菩提庵 木造觀音菩薩坐像 佛龕)

 2015115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575호로 지정되었다.

남해 보리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독립적인 관음보살상과

선재동자, 용왕이 협시한 불감형식의 작품이다.

현재 불감의 윗부분은 없어졌고 남아 있는 형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형식은 서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불감(1637-1644)을 시작으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행하였다.

 

관음보살상은 통통한 뺨, 보발이 없는 점, 대칭적인 연판, 양 측면에 늘어진 옷자락 등에서

조선 전기적 특징을 계승한 조선 후기 17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한 관음보살 삼존의 도상적 특징을 지닌 점과

사례가 적은 목조 불감형식, 17세기로 추정되는 제작 시기 등 자료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산신각








운무 탓에 전각을 제대로 둘러 볼 수도 없었고, 또한 출입이 금지된 곳도 많았지만 미련은 없다.

이미 보리암은 옛적에 둘러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보리암 투어를 끝내고 금산의 정상으로 향한다.




금산정상(망대)으로 가는 길














@유홍문상금산(由虹門上錦山)이란 문귀가 바위에 암각되어 있다.

"쌍홍문을 거처 금산에 오른다" 라는 뜻이다. 

주세붕(1495~1554)이 팔도유람을 하면서 이곳에 들려 남긴 것이라고 하는데,, 글쎄.















~제2부에서 이번산행의 하이라이트 부소암의 전경이 포스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