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양주 회암사 제1부) 양주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나그네 현림 2018. 8. 12. 13:58




(양주 회암사 제1부) 양주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 남쪽 기슭에 있는 회암사(檜巖寺)

고려 충숙왕 15(1328) 인도의 고승 지공 화상이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건설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1378(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고, 조선 성종 3(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 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이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게 했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 3(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시켰으나,

 당시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함께

특히 명종 때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고

덩달아 회암사 승려까지 미움을 받게 되니 200여 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빈집이 되어 버렸다.

이때부터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어느 때인지 모르게 풍상과 함께 회암사는 인멸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조선 초기 최대 왕실 사찰이던 회암사 터에 세워진

양주시에서 건립한 양주시립 화암사지 박물관은 회암사지 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

연구하여 전시를 통해 다음 세대에 교육하고자 건립한 역사유물 박물관이다.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인 회암사는 대규모일 뿐만 아니라 궁궐과 닮은 건축 방식이 특징이다.






















불상편


보광장식편






@수막새

목조건물에 기와를 덮는 풍습은 고대 동양 건축의 특색 중의 하나로 중국 주대(周代)부터 시작되었다.

전국시대에 타원형의 수막새를 붙이기 시작하였으며,

 (한대(漢代)에는 원형 수막새가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 기와 전래의 시기는 한사군설치 이후인 BC 2~1세기로 보이며, 삼국시대에

 불교 전래와 함께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가 제작되었다.

수막새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형성한 기왓골과 기왓등의 가장자리로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막음 하는 역할을 한다.

수막새에는 대부분 장식적인 문양이 새겨지는데 연화 무늬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외에 당초무늬·모란무늬가 많으며 때로는 문자나 명문(銘文)이 쓰이기도 한다.

또 귀면(鬼面)을 비롯한 각종 동물무늬가 등장하고 불·보살이나 인물이 조각되는 예도 있다.


암막새








불상의 손, 머리, 몸 편




신중상의 머리 편











@삼화상진영(三和尙眞影)

삼화상 진영의 인물은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의 3대 화상(三大和尙)을 말한다.

이들은 고려 말에 활약했던 선승(禪僧)으로,

지공은 나옹에게 의발(衣鉢)과 발우(鉢盂)를 전해주고

 나옹은 무학에게 의발을 전하여 사자 상승(師資相承)의 관계를 이루었다.

지공은 호승(胡僧)으로서 충숙왕대(忠肅王代)에 고려에 들어와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 후 원()에 들어가 고려인이 지어준 법원사(法源寺)에 머무르면서 많은 고려 승려들을 지도하였다.

나옹은 영해인(寧海人)아씨(牙氏)로서, 20세에 출가한 후 회암사(檜嚴寺)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고

 원에 들어가 지공을 뵙고 계합(契合)하였다. 지공의 법을 받고,

 귀국한 후에는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었다.

무학은 삼기인(三岐人) 박씨(朴氏)이다. 18세에 출가한 후, 공민왕 때 원에 건너가

지공과 나옹을 만나 법률을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나옹으로부터 불자(佛子)와 의발을 전해 받았으며,

고려 말기에는 왕사 등의 자리를 사양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되어 그를 도와 개국의 공을 세웠다.

(지공화상)  

고려 말기의 개혁파로 알려진 이들 삼화상(三和尙)은 조선시대 조사 신앙(祖師信仰)의 대상이 되어

 전국 사찰에 진영이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삼화상 진영은 회암사 외에도

삼화상 진영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와 의성 대곡사에도 모셔져 있다.



나옹화상


무학대사






@회암사 약사삼존도는 조선 전기 문정 왕후가 아들 명종의 쾌유와

세자 탄생을 빌기 위해 만들어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봉안한 불화로

1565(명종 20) 불화의 화기(畵記)에 의하면 문정 왕후는 명종의 장수와 선정(善政),

왕자의 다산(多産), 왕비의 회임(懷妊)과 훌륭한 세자의 탄신을 기원하기 위하여

 석가, 미륵, 아미타, 약사여래의 화상(畵像)을 각기 금화(金畵)와 채화(彩畵)50점씩,

모두 400점을 그려 회암사가 중수되어 경찬회(慶讚會)를 개최할 때 점안(點眼)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화기의 발문(跋文)은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인 나암(懶庵) 보우(普雨)가 썼으며,

그림은 도화원(圖畵院)에 소속된 전문 화가인 화원(畵員)이 그렸다.

 

문정 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된 회암사의 불화 400점 가운데 현재 6점이 전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쿠가와[德川] 미술관에는 붉은색의 비단 바탕에

 금선(金線)으로 도상(圖像)을 그린 약사 삼존도가 전하고 있고

일본 호쥬인[寶壽院]과 류조인[龍乘院]에는 비단 바탕에 채색과 금분(金粉)을 사용한

채화로 그려진 약사 삼존도가 전한다.

또한 일본 고젠지[江善寺]와 미국 뉴욕 버크컬렉션에는 채화로 그려진 석가 삼존도가 전하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선각왕사비

보물 제387. 높이 3.06m, 너비 1.6m. 1377(우왕 3) 고려 말 승려인 나옹(懶翁) 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비의 형식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것으로 개성이 없다.

그런데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면서 비신이 파손되어 보존 처리가 이루어졌고,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비신을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며,

회암사에 보관된 선각왕사비는 원형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제2부 회암사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