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선운사 참당암

나그네 현림 2018. 8. 4. 17:17




선운사 참당암


 

참당암(懺堂庵)은 선운사의 산내 4암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암자다.

지금은 선운사의 산내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懺堂寺) 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거찰(巨刹)이었다.

사찰 안내서에 의하면 삼국시대 의운(義雲) 스님이 산 가운데 터를 잡고

진흥왕(眞興王: 재위기간 540~576)의 도움으로 절을 세우고 '대참사(大懺寺)'라 하였다고 한다.

 

@ 참당암의 창건주로 일컫는 의운화상(義雲和尙)은 신라 진흥왕 때에 활약했던 승려라는 설과

백제의 승려라는 설이 있기도 하나,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신라 시대 선운산 도솔암 앞 법화굴(法華窟)에서 수도하던 중

 꿈에 우진국 왕의 계시를 받아 돌배에 싣고 온 불경과 불상, 보인(寶印) 등을 인수받은 뒤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05번지에

참당암(일명: 대참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대참사 사적기에 의하면 대참사는 신라 때에 의운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대참사란 의운화상의 성전 참회 발원에 의한 절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얻은 것으로,

대참사는 지금의 참당암을 일컫는다.

대참사 사적기에 그 창건 설화가 실려 있는데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산에는 동쪽 고개 위에 수십 인이 앉을 만한 평평한 암반이 있고

그 밑에는 백여 명이 들어 있을 만한 고왕굴(高王窟)이 있다.

그 앞 층암을 오르면 정상에서 해악(海嶽)이 한눈에 전망되는데 여기에 천상굴(天上窟)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수백 보 거리에 촉석이 둘러 있는 곳에는

 이무기가 살고 있던 용담(龍潭)인 아뇩지[阿耨池]가 있다.

또 여기에 도솔당이 있는데, 좌대와 같이 넓은 대암과 병풍과 같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이

사면을 두른 가운데 학이 깃들고 용이 머문 듯하면서 송풍라월(松風蘿月)의 묘한 경관을 자아낸다.

 

도솔암의 좌편에 열석굴(裂石窟)이 있다. 신라 왕이 왕위를 피하여 이 산속의 굴에서 수도하고 있는데,

꿈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암석을 깨고 출현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여기에 사찰을 세우도록 현기(玄機)를 내렸다.

중애사(重愛寺), 선운사와 도솔암 등이 그때 창건된 것이다.

수각

  

여기에 문수사(文殊寺)는 옛날 중국의 신승 한산(寒山)과 습득(拾得)

유희하던 곳이라고 하며(본방 중국천태산 천태사의 고승들 기담 참조) ,

운령사(雲嶺寺)와 개심사(開心寺)는 바로 개산 조사인 의운화상이 수도한 도량이다.

 원래 도솔암 앞에 법화굴이 있었는데, 의운화상이 머물면서 수도하던 곳이라 한다.

이때 산 아래 죽도(竹島)의 포구에 한 척의 돌배가 와 닿았는데,

그 배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마을 사람들이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면 그 배가 물러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의운화상이 그 배 안에 들어가니 옥축대장(玉軸大藏)

 석가모니 불상과 가섭(迦葉) 존자·아난(阿難) 존자 등 16나한상이 배 안에 병렬되어 있고,

또 금인(金人) 한 사람이 오른손에 옥으로 된 돛대를 잡고 비단으로 된 돛을 펼치고 있으며,

왼손에 아주(牙籌: 어금니 모양의 투호살/산가지)와 금자(金字)로 된 보인(寶印)을 잡고 배 위에 서 있었다.

 

의운화상이 그 사람에게 육지에 내려 불상 등을 봉안할 것을 의논하려 했으나

마땅한 도량을 정하지 못하여 별수 없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의운화상의 꿈에 그 금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于闐國) 왕인데 불경과 불상을 봉안할 성지를 보기 위해 동해의 여러 곳을 편력하던 중

이곳 선운산에 대참(大懺)의 빼어난 기운이 있고,

용당이 세워질 신령스러운 기운이 하늘에 뻗쳐 있음을 보고 이곳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여 이 경상을 봉안케 하라.’ 하였다.

이에 의운화상은 금인에게서 불경과 불상 및 나한상, 그리고 아주와 금자 보인을 받아,

이 산 가운데 길이 봉정할 도량을 택하여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가람을 개창하였다.

이곳이 바로 참당암이라고 한다.

산신각 

그리고 참당암을 일으킨 다음에 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용담(龍潭)에 살고 있던 이무기를 몰아내고

그곳에 다시 하나의 암자를 세웠는데, 용이 나온 곳이라 하여 기출암이라 하였다.

또한, 용담에서 나온 이무기를 몰고 간 사자(使者)가 흥성(興城) 땅 방등산(方等山)에 이르러,

 이 도량에 불법이 흥성하게 된 연유는 의운화상의 대발원에 의한 것으로,

선운사의 대중들이 대참사의 유나(維那)로부터 강주(講籌)를 받게 되고

 중애사의 집강(執綱)에서 수도하게 되니, 중애사는 실로 이 선운산 여러 사암의 중추가 되었다고 한다.

 

산신각 뒤편 풍경 

이상의 기록을 통해 신라 승려 의운화상은 당() 정관(貞觀) 연간에

서역의 우전국에서 전래한 불상과 불경 및 아주(牙籌보인(寶印)을 대참사에 모셨으며,

 신라 진흥왕의 시주로 몇 개의 사암을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1328(충숙왕 15)부터 이듬해까지 중수가 있었으며,

1346(충목왕 2)부터 1398(태조 7)까지 약 52년에 걸쳐 점찰신앙(点察信仰) 법회의 하나인 생회가 개설되었다.

 점찰신앙의 수행법은 점찰참법인데 점찰참법은 윷가지 모양의 간자(簡子) 10개에

살생·도둑질 등 열 가지 죄목을 써서 그것을 허공에 던져 나타나는 죄목을 보고 전생을 참회하는 것으로,

일찍이 신라 진평왕 때의 고승 원광법사(圓光法師:542~640)에 의하여 보급, 전승되었다는 수행법이다.

 이 점찰법은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진표(眞表)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었는데,

진표는 몸이 부서지는 맹렬한 참회를 행한 뒤 점찰법에 의한 참회불교의 체계를 정립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영심(永深)과 심지(心地) 등도 참회불교에 의한 해탈을 추구하였다.

 

참당암은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는데 먼저 1530(중종 25)에 재중수하였고,

이어서 1614(광해군 6), 병자호란 뒤인 1642(인조 20), 1794(정조 18) 4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당시는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 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성종대(1469 ~ 1494) 이후 선운사가 산중의 중심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대웅전 앞 마당에 세워 진 이 삼층석탑은

선운사 입구 부도전 바위 위에 있던 석탑을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부도전에 있었기 때문에 불탑형 부도로 보기도 하는데 아직 명확히 고증된 바는 없다.

탑신부와 상륜부만 온전하다.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참당암 대웅전>

@참당암(懺堂庵)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형식은 정면 3, 측면 3,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이다.

앞면 길이 1,080, 측면 길이 830, 주고(柱高) 303, 주초 높이 40등이다.

앞면 120높이의 석축 기단에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을 세웠다.

앞면 주간(柱間) 폭은 중앙이 440, 좌우의 칸이 각 320, 네 개씩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전각 내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후불탱화로 1900년에 조성된 영산회상도가 있다. 삼존불은 1561(명종 16)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의운화상이 신라 진평왕의 부탁으로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은 창건 이후 여러 차례 폐허가 되었다가 1329(충숙왕 16)에 중창하였다.

1982년 번와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753(영조 29)에 다시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수할 때마다 기존의 부재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1794(정조 18)에 간행된 참당사고사급법당기(懺堂寺故事及法堂記)에도 중건된 기록이 나와 있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으나 정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배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재활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할 수 있는 중

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천장의 중앙부는 높고 툇간 쪽은 한 단 낮은 층급을 둔 우물천장이다.

천장 아래로 노출된 부재에는 당초문 초각을 매우 복잡하게 틀어,

무척이나 화려하다. 내부는 우물마루이고,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형성한 후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다. 불단에는 삼존불상이 안치돼 있다.




신중탱.


팔공산 은해사의 청동북보다는 적지만 멋진 청동북이다.



@참당암 범종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6.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동종이다.

(현재 이 동종은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이관되어 보존되어 있다.)

이 동종은 19871213일 도난당했다가

1991331일 다시 찾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참당암동종은 전체 높이가 100이고, 입지름이 50,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종들 가운데 중간 크기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옅은 갈색을 띠고 있어 크기에 비해 무게는 상당히 가벼운 느낌을 준다.

 종의 형태는 종신 상부까지는 완만하게 내려오지만 중앙에서 종구까지는

거의 직선으로 떨어지고 있어 시각적으로 종구가 매우 좁아지는 모양을 보인다.

 낮지만 둥근 천판(天板) 위에는 음통(音筒)이 갖춰지지 않은 외래형 종뉴(鍾鈕)가 표현되어 있는데,

종뉴는 두 마리 용이 등을 맞대고 화염보주(火焰寶珠)를 얹은 모양으로 두 다리를 천판 위에 부착하고 있다.

선운사의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동종은 참당사가 아니라 원래 선운사의 산내 암자인

내원암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동종의 의의는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종의 일반적인 양식이나

 사장의 계보 및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응진전과 명부전

참당암 대웅전 오른쪽에는 응진전과 명부전이 한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다.

 전면 6, 측면 3칸으로, 응진전에는 봉안된 여래는

석가모니불, 제화갈라보살, 미륵불로 흙으로 빚은 조선후기 작품이다.

크기는 75~80cm이다. 명부전에는 목조지장보살과 권속들이 모셔져 있다.



왼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중앙은 현존불인 석가모니불, 우측은 미래불인 미륵불








@지장전

명부전 응진전 전각 뒤 편에 있는 지장전에는 특이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높이 80cm이며 무릎의 폭은 50cm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선운사약사여래불상(禪雲寺藥師如來佛像)로 불리는

이 약사여래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들었으며, 의왕불좌상(醫王佛坐像)이라고도 한다.

오른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대단히 희귀한 불상으로, 이 절의 창건 시 인도에서 왔다는 전설도 있다.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쥐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이 선운사약사여래불상으로 알려졌지만,

머리에 두건을 쓴 전형적인 두건(頭巾) 지장보살상이다. 고려말 혹은 조선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9.6.26일 보물 제2031호로 지정되고 명칭도 석조지장보살좌상으로 정정되었다.)



 

얼굴은 풍만하며 가는 눈초리와 작은 입, 반달형의 눈썹으로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의 두건은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두른 뒤 이마 부분에 긴 끈을 묶어 귀 뒤로 내린 형식이다.

양어깨 밑으로 길게 드리워진 머리띠 자락의 끝부분은 3엽의 꽃무늬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목에 삼도(三道)를 새겼다. 선운사와 도솔암의 지장보살과 같이

 목 아래의 목걸이는 가운데에 화형(花形)의 고리 장식을 달고

가슴 가운데로 세 가닥의 장식을 늘어뜨린 화려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사(袈裟)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으로

오른쪽 소맷자락을 허리 아래에서 가사 자락 밑으로 여며 넣었다.

옷 주름은 폭이 넓고 직선적인 평판 형태로 단순화되어 활력을 찾을 수 없다.

군의(裙衣)는 가슴까지 치켜 올라가 있으며, 복부에는 군의를 묶은 허리띠 매듭이

나비 리본 형태로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엄지와 둘째 손가락 사이에 보주를 쥐었으며

왼손은 손가락을 곧게 펴서 가부좌(跏趺坐)한 무릎 밑으로 내렸다.

가부좌한 하체에는 오른쪽 발목이 노출되어 있다.

 

머리띠로 묶어 내린 두건의 착용 방식과 세 줄의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이 달린 목걸이,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다가 팔꿈치 부근에서 삼각형 꼴로 접힌 옷 주름 표현 등에서

도솔암 내원궁에 안치된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

선운사 승보박물관에 봉안된 보물제279호 금동지장보살좌상과 같은 계열의 지장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도솔암 내원궁의 지장보살상은 왼손에 보주가 아닌 법륜(法輪)을 쥐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약사여래상이라기 보다는 옥제 지장보살좌상이라함이 옳을 듯하다.



선운사의 삼장 지장을 가리킬 때는 선운사의 지장보살을 지() 지장보살,

도솔암의 지장보살을 천() 지장보살로 칭하며,

참당암의 지장보살은 인() 지장보살이라 불린다.

굴곡이 적은 직선적인 신체, 크고 넓적한 얼굴, 직선적으로 가늘게 그어진 눈매와 딱딱한 표정,

평판적인 옷주름 표현 등에서 조성 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선운사로 내려가는 길목에 조성된 보합을 든 약사여래와 그 옆 정자는 검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