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국보제1295호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나그네 현림 2018. 7. 7. 19:52

 국보제1295호 괴산(槐山) 각연사(覺淵寺) 통일대사탑비(通一大師塔碑)

 

각연사 통일대사탑비는 각연사 입구 돌계단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우측의 오솔길이 보인다.

 이 길이 보개산과 칠보산으로 가는 등산로인데 이 계곡을 따라 1km 쯤 걸어가면

개울 건너 좌측에 소나무가 우거진 평탄한 곳이 나온다.

이정표가 있어 찾아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다.

통일대사탑비는 그곳에 북향으로 약 1정도 높이의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다.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槐山 覺淵寺 通一大師塔碑)는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화강암으로 조성한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 등의 양식이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 초기에 걸친 수법을 잘 보여주는

고려 초기의 석비로 199962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95호로 지정되었다.

 

@사찰 탐방을 하다 보면 건성으로 보기 쉬운 것이 사리탑비(부도비)와 부도다.

불상에 대해서는 큰 지식이 없어도 전각 명으로도 대략 파악할 수 있지만

탑비와 부도에 대한 것은 그 앞에 세워 둔 안내판을 보드라도

용어부터 생소하고 또 사실 무엇을 어떻게 눈여겨보아야 할지 난감하여

지금까지는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번 각연사의 부도비와 부도를 탐방하면서

 피상적이지만 탑비와 부도라는 석조물의 구조와 그 명칭을 살펴보았다.

아래 사진은 필자와 같은 초보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반적인 탑비의 구조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통일대사탑비는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지대석 위에 귀부를 놓고, 귀부 등에 비좌를 얹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우고, 상부에 이수를 장식하였다.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을 말한다.

화강석으로 된 귀부는 배면 전면에 걸쳐 아무런 장식이 없는 편장 6각의 귀갑문을 조각하였고,

귀두는 용두화하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귀는 작고 눈은 둥글고 크며 안상은 험상궂다.

귀부의 등에 얹은 비좌는 양옆에 안상을 조각하였으며

안상 안에는 쌍어문(雙魚紋)을 새겼고,

윗면에는 복련을 돌리고 받침을 만들어 비신을 세웠다.

거북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어 있는 것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오면서 나타나는 양식상의 특징이다.



















<비신(碑身)>

통일대사비의 비신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고

거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다.

거북 받침돌은 등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비신은 높이 258, 128, 두께 25.4,

비문은 해서체로 4648, 3,500여 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마멸되어 260자 정도의 명문만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비신(碑身)의 앞면은 비양(碑陽)이라 하고 뒷면은 비음(碑陰)이라 한다

비문에는 건립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선금석고(朝鮮金石考)에 실린 비문 내용에 의하면,

통일대사(通一大師)의 속성은 김씨로 선조는 계림인(鷄林人)이며,

고려 초에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왕실에서 불법의 진리를 강론하는데,

대사의 법문을 듣고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사가 입적하자 고려 광종이 통일대사(通一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한림학사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하여 탑비가 세워졌다.

김정언은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전남 광양, 옥룡사 동진대사탑비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

<이수(螭首)>

통일대사비의 이수는 높이 110, 175, 두께 76

아랫면에 2단의 받침을 세우고 앙련을 새겼다.

이수(螭首)는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을 말한다.

이는 뿔이 없는 교룡을 가리킨다. 이수의 사면에 조각된 네 마리의 용은 웅장한 느낌을 주며,

중앙에 보주를 장식하고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안으로 향하여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비신 상부에 용의 형상을 조각한 이수를 갖춘 것은 비의 품격을 높이고 장엄하게 보이게 한다.

그리고 특정한 사실을 담고 있는 비신이 이룡의 수호로 파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후대에 계승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수의 상단 중앙에는 보주를 조각하였다.

 

@이수(螭首)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

()는 다양한 기능과 성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재료로 세워졌다.

석비(石碑)는 처음에는 돌로 비신만 세우는 단조로운 형태에서 기술의 발전과

 미적 감각의 진보에 따라 추가로 받침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글자를 새긴 비신을 올리고,

비신 상부도 장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신의 받침대에는 귀부(龜趺)가 마련되고,

비신 상부에는 이수(螭首)가 조각되었다.

 



이수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여

한국이나 일본 등 한자 문화권에서 오늘날까지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석비가 많이 건립된 동아시아에서 비신의 꼭대기에 표현된 용을 이수라고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석비의 받침부인 귀부와 함께 이수는 비신의 상부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특히 석비의 머릿돌에는 머리가 비상(飛翔)하는 듯하고

비늘이 표현된 몸체가 구불구불 감겨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조각된 이()가 주요 형상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비신의 머릿돌인 비수(碑首)에 새긴 이라는 의미에서 이수라고 하였다.

이는 석비의 위상과 품격을 높이고, 비신에 새겨진 비문(碑文)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은 세계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 오래전부터 신화나 전설의 소재로 등장한 이후

오늘날까지 신성시되고 있는 대표적인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청동으로 제작한 동기(銅器), 소리를 내는 동종(銅鍾),

궁궐의 장식물과 인장(印章), 돌로 제작된 묘지(墓誌)와 비()의 머릿돌 등 다양한 조형물에 표현되었다.

 ()는 중국에서 서주(西周) 후기 무렵부터 다리와 뿔이 없이

작고 긴 몸체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동양의 고전인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산해경(山海經)등에 의하면,

뿔이 없는 용 또는 호랑이 형태를 하고 비늘을 가진 용을 이룡(螭龍)이라 하였다.

또한 박물도록(博物圖錄)에도 이룡은 뿔이 없으며 만물에 해를 끼친다고도 묘사되었다.

석비에서 이수는 본래의 이룡(螭龍) 모습과 함께, 아직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땅 위에서 구불구불 감긴 형상으로 몸체가 표현되는 반룡(蟠龍)의 모습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한국의 이수는 뿔이 달린 용으로 많이 표현되는 특징을 보이며,

용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옆이나 위를 향하도록 조각하여

 승천하는 용의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여러 마리의 용이 뒤엉키며

한가운데나 꼭대기에 배치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입이나 발로 받치는 형상으로도 표현되었다.

이수가 석비의 중요 구성물로 등장하게 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660년대 초반경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기에 제작된 이수는

아래로 향한 모습의 용의 머리가 측면에 표현되어 있다.

 

그 후 이수는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승려들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의 주요 양식으로 정착되었는데,

이때는 구름 속에서 여러 마리의 용이 다양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 조각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묘비와 신도비(神道碑) 등 다양한 기능과 성격으로 건립된 석비에 이수가 표현되었다.

 조선 시대의 이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름 속의 용이 표현되었는데,

용의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예도 있고, 서로 마주 보고 여의보주를 받친 형상을 취하기도 한다.

 

비신 상부에 용의 형상을 조각한 이수를 갖춘 것은 비의 품격을 높이고 장엄하게 보이게 한다.

그리고 특정한 사실을 담고 있는 비신이 이룡의 수호로 파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후대에 계승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시대와 지역별로 이수의 조각 기법이 달라 석비 양식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