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명산과 사찰

통일신라의 걸작품 석조 비로자나불을 모신 괴산 각연사

나그네 현림 2018. 7. 5. 21:39

통일신라의 걸작품 석조 비로자나불을 모신 괴산 각연사

 

일요일 아침. 날은 흐리지만, 다행히 비 소식은 없다.

초파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름난 사찰은

아마도 이번 주는 뒷마무리 작업으로 부산할 것 같아

조용한 사찰을 찾다가 괴산의 각연사가 생각이 나 들렸다.

 

각연사(覺淵寺)는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보개산(寶蓋山)에 있는 절로

 신라 법흥왕 때 유일(有一)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 소속이다.

유서 깊은 고찰은 으레 설화나 전설이 있듯 각연사 역시 이런 전설을 품고 있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유일대사가 사찰을 짓기 위하여 현재의 칠성면 쌍곡리 사동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까마귀 떼가 나타나서 대팻밥과 나무 부스러기를 물고 날아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까마귀를 따라가니,

조그마한 못에 물고 온 대팻밥을 떨어뜨리고는 못가에 앉아 쉬고 있었다.

 유일이 물속을 들여다보니 한 석불이 있었으므로

깨달은 바 있어 못을 메워 절을 짓고 <깨달음이 연못 속의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覺有佛於淵>이란 말에서 각연사(覺淵寺)라 사명(寺名)을 정했다고 한다.

연못에 건져 올린 그 불상이 지금의 비로전에 봉안된 보물 제433호인 비로자나불상이라고 한다.

그 뒤 이 불상에 지성으로 기도하면 영험이 크다 하여 참배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각연사는 사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칠보산(七寶山)을 마주한 보개산(寶蓋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칠보(七寶)와 보물(寶物)로 둘러싸인 절이라는 의미인데

사찰 규모는 적지만 3개의 보물을 지니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창건한 각연사(覺淵寺)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석조 비로자나불상(보물제433) 외에

고려 광종 대에 세운 통일대사탑비(通一大師塔碑: 보물제1295)

통일대사부도(보물 제1370)가 있다.

그리고 1768(영조 44)에 새로 수리한 대웅전과

1771(영조 47)에 금()을 새로 입힌 석가여래좌상·아미타여래좌상·약사여래좌상 3구가 전한다.

1718(숙종 44)에는 3구의 불상에서 땀이 흘렀다는 기이한 이야기도 전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비로전, 대웅전, 삼성각 및 요사채 2동 등이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인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서

융경(隆慶순치(順治강희(康熙) 연간과 1768년에 중수되었으며,

그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며

1771년에 개금한 기록이 전한다. 지금은 석가모니불과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그밖에도 이 절에는 무게 937.5의 범종(梵鐘)과 법고(法鼓운판(雲板)을 비롯하여

보물 제1295호인 통일대사탑비와 보물 제1370호인 통일대사부도,

조선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선적당(善跡堂)에 있는 부도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부도, 비로전 동쪽에 있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석조귀부(石造龜趺)와 팔각옥개석(八角屋蓋石) 등이 있다.

 

근래 들어서도 불사가 계속되었다. 현재 각연사에는 비로전과 대웅전 외에도

 삼성각, 종각, 선원 및 요사가 건립되어 있다.

이 중 각연사의 요사와 비로전 뒤편의 선원은 1992년에 건립했으며,

삼성각과 종각은 1996년에 건립했다


중앙이 대웅전, 왼쪽은 종무소, 언덕 오른쪽에 비로전이 있고, 대웅정 옆에 범종각과 그 뒤에 삼성각이있다.


종무소









범종각





<대웅전>

@각연사는 신라 시대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데 대웅전은 조선 후기 건물로

19821217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은 절의 중앙에 위치하며,

네모난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정방향으로 놓여 있다.

정면 3, 측면 2칸으로 된 1층 건물로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빗살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고, 옆면 앞쪽에도 빗살문을 달았다.

내부에는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장엄한 닫집이 있고, 불상이 모셔져 있다.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융경(隆慶,1567-1572),순치(順治,1644-1661),

강희(康熙, 1662-1722) 년 간에 보수한 바 있지만,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 영조(英祖) 44(1768)에 중건된 건물이며

최근에는 1979년에 보수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주불로 석가여래(釋迦如來), 약사여래(藥師如來)

그리고 통일대사소상(通一大師塑像)이라고 구전되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봉안되었으며

이는 1771년 개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현재 법당에서는 약사여래가 아닌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1768년에 건립한 것이다.

(석가모니불)


(관음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은 삭발했거나 머리에 두건을 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다.

이 지팡이 머리에는 여섯 개의 작은 고리가 달려있어 '육환장'이라고 부른다.

 다른 손에는 '장상명주'라는 투명한 구슬을 쥐고 있다.

@지장보살은 머리에는 천관(天冠), 오른손은 보주를 든 상이나

 후세에는 육환장을 든 승려의 모습이나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조성되기도 하는데

각연사의 지장보살은 두건을 쓰고 육환장과 보주를 들고 있다.

혹자는 상량문의 기록을 빌어 이 불상을 약사여래라 말하는 데

보주를 든 약사여래는 있지만 육환장을 든 약사여래는 없다.

약사여래와 육환장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유사』 「신주편을 보면

밀교 승려 밀본(密本)이 약사여래의 힘을 빌려 선덕여왕의 병을 고쳤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병을 얻어 오랫동안 낫지 않자 밀본을 궁궐로 초청하였다.

밀본이 왕 옆에 앉아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을 독경하자

 육환장이 침실로 날아들어 늙은 여우 한 마리를 뜰 아래로 내던졌다.

그제야 선덕여왕의 병이 씻은 듯 나았고,

밀본의 이마 위에 신비스러운 빛이 비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회화나 탱에서도 약사여래가 육환장을 들도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음으로

이 불상은 당연히 지장보살로 보아야 한다.

상량문에 기록된 약사여래는 추측건대 1771년 개금후 멸실되고

이 지장보살로 대체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신중탱








@대웅전 내 동편에는 승려 상이 있는데, 조성연대나 동기에 대한 자료가 없어,

 유일대사, 혹은 달마상으로 말하는 이도 있는 데 사찰 안내서는 통일대사라 명명되어 있다.

회분으로 칠한 것이 변색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최근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조상은 흙으로 빚은 것으로 높이는 130이며,

머리에는 건모를 썼고, 결가부좌한 채 양 무릎 위에 놓은 손에는 단장(短杖)을 들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괘불대



삼성각



산신


칠성탱


독성


대웅전에서 조망한 종무소. 우뚝 솟은 산봉이리는 칠보산이다.


범종각과 대웅전


대웅전에서 비로전 가는 길














<비로전>

비로전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물 제433호인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1975년에 보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비로전은 현재 각연사의 사찰에 건립된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고려 초기에는 통일(通一)이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고려 혜종 때 새로 중수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1648(인조 26)1655년의 중수를 거쳐서

1899년에는 비로자나불의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이루어졌다.

그 뒤에도 1927년과 1954, 1965, 1975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각연사 비로전(毘盧殿)에 모셔져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시대 조성된 불상이다.

불상의 총 높이는 3.02m, 상 높이 1.28m. 보물 제4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불상은 비로전 내에 봉안된 주존불로

광배와 좌대를 갖춘 완전한 형태로서 조성연대는 신라 하대인 9세기 후기로 추정된다.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관한 명문과 문헌 기록이 전혀 없어서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불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되었으나, 채색은 후대에 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부언하자면,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은 흰색으로 채색되고

손은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용 또는 사자를 타고 다니고 수레바퀴를 상징으로 하며,

 5온 중에서는 색을, 소리로는 '' 또는 ''이라는 음을, 우주의 구성요소로서는 공간을,

감각으로는 청각을, 감각기관으로는 귀를 담당하고 있고, 인체에서의 위치는 머리이다.









신중탱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광배와 대좌를 잘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서


 비로자나불상의 도상적인 특징인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불상은 편단우견(偏袒右肩) 형식으로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각연사의 비로자나불은 같은 시대인 통일신라 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석사 자인당의 비로자나불이나, 동화사 비로자나불, 축서사의 비로자나불과 같이

가부좌한 한쪽 발이 완전히 노출된 것이 아니고 법의에 가려져 발가락 일부만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상은 어깨가 넓고 허리가 짧아 역삼각형의 불안한 느낌이 들지만,

하체가 두꺼워 안정감은 충분하다.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정수리 위에 솟아 나온 부분)

밋밋한 얼굴, 가늘고 긴 눈썹과 눈, 부푼 듯한 눈꺼풀과 양 볼을 지니고 있다.

법의의 주름은 불신(佛身: 붓다의 몸)의 윤곽을 따라 유기적으로 처리되었으나 형식화되어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뒤편에 있는 광배(光背)는 연잎 형으로,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다.

광배는 불상 전체를 감싸는 거신광(擧身光)이며,

두 개의 돌기로 두광(頭光 : 머리 주위의 빛의 표현)과 신광(身光: 몸 주위의 빛의 표현)을 구획하였다.

 두광과 신광 속에는 연화문(蓮華文)을 중심으로 초화문(草花文)이 있고,

그 바깥에는 빛을 표현한 화염문(火焰文: 불꽃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광배에는 9구의 화불(化佛: 작은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두광 윗부분에 3구와 좌우에 각각 3구가 있다.

 이들 화불도 주존인 비로자나불상과 같이 지권인을 하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화려한 연(: 가마)이 새겨져 있고 가마 하단에는 연화문 장식이 있으며,

가마 정상 중앙에는 불꽃무늬의 보주(寶珠: 보배로운 구슬)가 새겨져 있으며,

보주로부터 아래로 드리워진 장막은 매우 화려한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번 방문할 때는 볼 수가 없었다.



 

대좌는 방형(方形)의 지대석(地臺石: 불상을 놓기 위하여 마련한 받침돌) 위에

 팔각연화대좌(八角蓮華臺座)로서 상대(上臺)와 중대, 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상대를 이루고 있는 앙련(仰蓮: 연꽃이 활짝 핀 모습)

단판(單瓣 : 연잎 하나로 된 문양) 형식으로서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연잎 가운데를 꽃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다.



중대는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구름이 힘차게 뒤엉켜 있는 모습으로

 7()에는 사자가 각각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1면에는 연꽃 봉오리가 표현되어 있다.

 일곱 마리의 사자는 그 표정이나 자세가 다양하여 조각가의 창의력이 돋보인다.

팔각의 하대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으며, 4()의 안상에는 향로(香爐),

나머지 4면에는 2면씩 각각 꽃무늬와

가릉빈가(迦陵頻伽: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상상의 동물)가 표현되어 있다.

 

넓은 이마에 비교해 턱이 좁고, 건장한 어깨와 대조적으로 허리가 짧으며,

얼굴이 밋밋한 느낌 등 통일신라 시대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광배 가장자리에 한 번 꺾여 들어간 부분이 아래로 치우쳐 있는 것도 이 시기 불상의 특징이다.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시대 9세기 중반에 유행한

비로자나불 신앙의 유행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넓은 어깨에 비교해 짧은 허리,

역삼각형에 가까운 상호, 가늘고 긴 눈, 광배의 문양 장식과 형태 등

통일신라 시대 9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9세기 비로자나불상과 차이가 있다면,

무릎을 덮고 있는 법의의 표현이 독특하고, 양발의 끝부분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석조비로자불좌상의 가장 큰 특징은 광배 뒷면에 화려한 연()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예라고 하는 데 불상 뒤편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요사채로 가는 기는 계단












~2부는 국보 제1295호 각연사 통일대사 탑비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