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림사의 국보 제201호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지림사(智林寺)의 국보 제201호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北枝里 磨崖如來坐像)
영주 부석사를 들렸다가 귀경길에 축서사를 방문하게 되었고
축서사 유래에서 알게 되어 들린 곳이 지림사다. 지림사는 축서사를 가는 길목에 있다.
@지림사 창건배경 및 역사
호랑이가 걸터앉은 것과 같은 형국이란 의미를 지닌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호거산에 자리하는 지림사(智林寺)는 국보 제201호로 지정된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이 현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7세기경 제작된 부조형식의 여래좌상으로
야산 기슭의 천연암반에 조각되어 있다. 불상 주변에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이 될 정도의 대사찰이었던 곳으로 축서사 창건설화에도 등장한다.
즉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 쪽을 바로 보니
멀리 서광이 비취는 것이 보여 빛이 도달한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조선 정조 때(18세기)에 저술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智林寺在文殊山)’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계속하여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온 것으로 알 수 있으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혹은 ‘축서사로 인하여 사세가 기울었다’라는 등의 이유로 폐사되었다고
구전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현재의 지림사는 1949년경 권보훈(權普勳)이라는 승려가
현재 위치에 수월암(水月庵)이란 조그마한 법당을 세우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 국보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을 보호 관리하며
사명(寺名)을 지림사(智林寺)로 다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지림사가 있는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는 신라 시대에 27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5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다고 하는 '대사(大寺, 한 절)' 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물야면 인근에서 '대사(大寺)'란 이름이 새겨진 기왓장이 발굴되고,
절집 옆을 흐르는 작은 개천의 보를 '한절보(大寺洑)'라고 부르는 것에서 큰 사찰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복지리마애불좌상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1980년 9월 16일 국보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마애불은 호골산(虎骨山) 줄기 끝부분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1947년 부지정리 중에 발견되었으며 현재 불상의 보존관리를 위하여
목조한옥 맞배 보호각 1동을 신축하였으며 단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존 마애불은 높이 5m, 폭 4m의 바위에 새겨진 좌상이다. 불상의 키도 4m 남짓 된다.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는 듬직한 얼굴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모습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떨어져 나가기도 해서 거친 느낌을 준다.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手印)을 갖추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주위로 화불(化佛)이 조성되어 있는데
신광 부분인 몸 양편에 화불이 각각 두 분씩 네 분이 새겨져 있고,
두광에는 깨지지 않은 부분에 두 분이 있는데,
전체가 다 있었다면 두광에는 일곱 분을 새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괴산 각연사의 비로자나불이나,
부석사 자인당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의 광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라 석불의 광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형적인 부조 양식이다.
두광에는 연꽃 모양이며 그 주위에는 불꽃무늬가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다.
얼굴은 넓고 큼직하며 풍화가 심해 표정이 뚜렷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어려 있어 원만한 상호였을 듯싶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 가흥동 삼존불좌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 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파손된 오른 손
파손된 발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은 원래 감실(龕室) 안의 본존불(本尊佛)로 조성된
보기 드문 신라 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이다.
현재 감실의 돌벽(石壁)도 무너졌고, 불상에도 군데군데 다소 파괴되고 풍화되었지만,
아직도 부처의 위용(偉容)은 여전히 남아 있는 편인데
거의 원각상에 가깝게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겼기 때문에 위엄스러운 모습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더구나 네모진 얼굴에 내면적인 힘과 고졸(古拙)한 미소를 은근히 나타내고 있는 점이나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무릎에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는 큼직한 두 손은
이 불상의 적정(寂靜)한 위용을 한결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넓은 무릎과 무릎은 덮어 내린 옷자락의 소박한 상현좌(裳縣座),
불상 주위에 새긴 예스러운 화불(化佛)들과 함께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각력 때문에 실제의 제작년대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 중엽경의 위엄스럽고 자비스러운 불상미(佛像美)를 잘 보여주는 이 북지리마애여래불좌상은
큰절의 본존불답게 신라 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지림사는 현재 불사 중인 모양이다. 극락전은 전각만 짓고 아직 불상을 모시지 못했다.
대웅전은 그래도 불상을 모셨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그런가 보다.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봉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