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속으로(3/3) 백양사 마지막 단풍축제일에
가을빛 속으로(3/3) 백양사 마지막 단풍축제일에
백암산 백양사는 바로 옆 단풍명소로 알려진 내장산 내장사와 마찬가지로
사찰로서 이름이 알려진 것이 아니고 사실 단풍으로 유명해진 사찰이다.
백양사 단풍은 한 때 내장산의 단풍에 밀려 그리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단풍철마다 내장산 단풍과 더불어 국내 최고 단풍명소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백양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는 것이 단연 쌍계루 앞 연못에 비친 백학봉과
단풍으로 물든 그 풍광이다. 이 멋진 풍광을 잡으려고 뭇 진사들이 몰려든 것이
백양사가 단풍명소로 자리하는 데에 큰 몫을 담당했다.
몇 해 전인가 백양사를 찾았을 때는 이미 단풍시즌이 끝난 때라 반영만 보고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 아쉬움 때문에 다시 백양사를 찾게 되었다.
제1부와 2부에서 이미 반영과 단풍을 올렸기에 제3부에서는 백양사 전각 위주로 포스팅한다.
이번 백양사 기행이 역순으로 올린 것은 처음에는 백양사만 둘러보기로 했지만
토요일 늦은 시간에 백양사에 도착하여 숙소를 구하지 못해 정읍에서 일박하는 관계로
계획에 없던 내장산 단풍을 먼저 둘러보고 들린터라
귀경시간을 감안하여 짧은 산행이지만 백양사 약사암을 먼저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백양사을 들렸기 때문이다.
백양사 창건 유래
1400여 년 전 백제 무왕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한 백양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며 5대 총림 중 하나에 속한다.
5대 총림(叢林)은 해인사 해인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수덕사 덕숭총림, 백양사 고불총림을 말한다.
창건 당시는 <백암산 백암사>라 했는데 이는 백양사 뒤편 우뚝한
백암산의 돌이 모두 흰색인 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한다.
고려 덕종 3년(1034) 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절 이름을 <정토사>로 개명하였는데
그래서 고려시대 기록에는 정토사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 선조 7년 환양선사에 이르러 다시 백양사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그의 다음 주지인 소요대사의 비명(碑銘)에 기록된 바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대웅전과 사천왕문 등은 1917년 일제 강점기 시대 본 말사(本末寺) 제도가 만들어 진 후
제 2대 주지스님으로 취임한 만암종사가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백양사 사천왕. 좌로부터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동방수호신 지극천왕)
백양사(白羊寺)란 이름은 하얀 양(白羊)을 제도한데서 유래했다는 설화가 전하다.
이는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說)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운집했다고 한다.
그 법회 3일 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된 법회가 끝나는 날 밤
스님의 꿈에 그 흰 양이 나타가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이 소멸하여 다시 천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튼 날 아침 영천암 아래에 흰 양 한 마리가 죽어있었는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白羊寺)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좌로부터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동방수호신 광목천왕)
범종루
만세루
대웅전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이 처음 지은 후 여러 차례의 공사와 명칭의 변경이 있었던 사찰이다.
지금의 백양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이 다시 지은 이후부터이다.
환양이 백양사에 있으면서 매일 『법화경』을 읽을 때 흰 양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지자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쳤다고 한다.
대웅전은 1917년 절이 다시 지어질 때 같이 세운 것으로,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상과 10척 높이의 불상, 용두관음탱화를 모시고 있다.
또한 오른쪽으로는 바늘 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는 나한의 그림 16점이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규모가 큰 법당에 속한다.
2단의 긴 돌로 쌓은 기단 가운데로 계단을 두었다.
백양사 대웅전은 일제시대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 후기의 화려한 다포 양식에서 후퇴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917년 만암대종사가 백양사를 중창하면서 건축한 것으로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양사 대웅전은 1974년 9월 24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칠성각
진영각
극락보전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 여환이 세웠다고 하는데,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지금의 절은 1917년 송만암이 고쳐 세운 것이다.
극락보전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한응선사가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사찰사료』를 보면 건물을 지을 때
조선 중종(재위 1506∼1544)의 비인 문정왕후가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부에는 담담한 기법으로 처리한 단색벽화가 있다.
백양사 극락보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맞배지붕을 가진 건물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다포양식으로 절충해 지은 점이 특이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2호.
낮은 석조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 처리한 원기둥을 세워 기본구조를 마련하였다.
백양사 극락보전은 1972년 8월 7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9호. 불상 높이 205㎝, 무릎 폭 148㎝. 나무로 전체 윤곽을 만들고
주름이나 살집 등을 표현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흙을 활용하여 완성한 불상이다.
높이 2m가 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불상으로,
낮고 넓은 무릎과 늘씬한 상체를 가지고 있어 장대한 형태미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대한 형태미는 17세기 전반기의 대형 소조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아직까지 초창과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이 불상의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2005년 2월에 발견된 복장물에서
1741년(영조 17) 명부전의 시왕상 중수와 함께 개금불사를 시행했다는 복장기와
1775년 개금불사를 시행했다는 중수기문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이 불상은 1741년과 1775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41년 중수에는 철관스님을 증명으로 취성, 사인, 계잠, 성순, 도환, 계초가 화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775년 개금 중수에는 백월, 색민, 정암 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중수 개금에 참여한 색민은 우수한 화적을 많이 남긴 불화승이다.
명부전
우화루